法 “공무원 ‘팔 길이 원칙’ 안 따르면 형사처벌까지”
입력 2017-07-28 05:00
법원은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으로 기소된 이들을 단죄하면서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거론했다. ‘정부는 예술 활동을 지원하되 간섭해선 안 된다’는 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담당 공무원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천명했다.
상관의 명령을 따랐다고 해서 부하 공무원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법치주의를 지켜야 할 공무원은 대통령을 포함한 상관의 위법한 지시보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먼저 따라야 한다는 판단이다. 1심 법원은 이런 관점에서 블랙리스트 운영을 지시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과 이에 복종한 수석·장관·비서관 등을 전원 유죄 선고했다.
“공무원, 위법 명령 거부해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27일 박근혜정부의 블랙리스트 작성·운영 행위를 ‘형법상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라고 판단했다. “정부가 추진한 정책 하나하나에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김 전 비서실장 등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오히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범행을 가장 정점에서 지시하고 독려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공무원의 직권남용죄 인정 여부에 관심이 쏠렸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지시를 하급 공무원이 따랐다면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가 이번 재판의 최대 관심사였다.
재판부는 199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1996도3376)을 유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상관의 명령이 위법할 경우 그 자체로 직무상 지시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부하 공무원은 이를 따를 의무가 없다는 판례다. 이 판례에 따라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박근혜정부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비정상의 정상화’의 일환이었다는 반론도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좌편향 정책을 수정한다는 의도였다고 해도 이는 적법한 절차에서 투명하게 실시돼야 한다”며 “하지만 블랙리스트를 통한 보조금 배제 정책은 은밀하고 위법한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좌파’ ‘야당 지지’ ‘세월호 시국선언’ 등 리스트 선정 잣대도 “합리성을 찾을 수 없는 기준”이라고 꾸짖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공범 인정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국장 인사 좌천 혐의에 대해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과 더불어 지시를 따른 수석·장관 등을 모두 공범 관계로 인정했다. “노 국장과 진재수 과장,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인사조치 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는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직업공무원 제도를 본질적으로 침해한 위법한 행위였다고 봤다. 노 전 국장은 당시 2급 공무원이었다. 위법한 지시를 따른 김상률 전 수석과 김종덕 전 장관이 유죄를 선고받았으니 지시자인 박 전 대통령 역시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블랙리스트 수행 지시를 따르지 않은 문체부 실장(1급) 3명을 사직하도록 한 일은 무죄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1급 공무원은 신분보장 대상의 예외이기 때문이다.
한편 재판부는 블랙리스트 범죄에 대해 “다른 국정농단과는 성격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보수주의를 표방한 대통령을 보좌하는 공무원들의 의욕이 지나쳐 범행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향후 항소심에서 감형을 호소할 피고인들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양민철 이가현 기자 listen@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