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민주주의 훼손한 ‘블랙리스트’ 중형 선고 당연하다

입력 2017-07-27 17:39
법원이 27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국회에서의 위증 혐의만 적용돼 집행유예로 풀려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제외한 관련 피고인 전원에게 “청와대 비서실장, 장관 등으로 일했던 피고인들이 주어진 막대한 권한을 남용해 범행 계획의 수립과 실행 지시를 담당했다”며 엄하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블랙리스트 작성 자체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권력 남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판결이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을 비롯한 피고인들이 은밀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범법행위를 저질렀다고 적시했다. 또 “김 전 실장은 가장 정점에서 지시하고 독려했으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판단해 블랙리스트를 만들라고 지시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다는 김 전 실장의 주장을 전적으로 배제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폐단을 되살리며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저버리고도 법적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빠져나가려던 ‘법꾸라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건 중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단죄하기 까다로운 사건으로 꼽혔다. 한정된 재원을 분배하는 것은 정책적 판단에 근거한 예산 운용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언뜻 보기에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문화 표현의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건전한 비판을 담은 창작활동을 제약할 수 있으므로 헌법정신에도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특히 “피고인들은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지만, 위법 부당한 명령을 실행한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며 공무원의 업무는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물론 이날 선고가 김 전 실장 등 피고인들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단은 아니다. 공소장에 직권남용 혐의가 포함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선고도 남아 있다. 그러나 비록 1심이지만 재판부가 제시한 헌법과 민주주의의 원칙은 반드시 되새겨야 한다. 그런 원칙을 지키며 책임을 묻고 잘못을 고쳐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