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지성적 신앙과 일상의 聖化

입력 2017-07-27 17:48

마르틴 루터(1483∼1546)의 교회개혁 500주년을 맞아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주제가 ‘지성적 신앙과 일상의 성화(聖化)’입니다. 이 주제에는 한편으로 한국교회 보수집단의 반지성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집단의 반신앙주의를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반지성주의에 대한 극복방안으로는 ‘지성적 신앙’을, 반신앙주의에 대해서는 ‘일상의 성화’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모든 보수집단이 다 반지성적인 것도 아니고, 진보집단이라고 모두 반신앙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국교회를 양분해 말한다면 반지성주의의 뿌리는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적 배경, 성경학교 수준의 교역자 교육정책, 서구 우월주의 의식에 더해 샤머니즘적 토양과 일제 식민지배, 한국전쟁, 근대화와 개발독재라는 역사적 경험으로 소급됩니다. 반지성주의 전통은 교역자 권위주의와 기복신앙, 교권주의로 더욱 견고해졌고, 보수교회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3무(無) 집단, 곧 무지, 무식, 무모 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진보집단의 반신앙주의는 신앙 그 자체에 대한 불신보다 한국교회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의 성화를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분리하지 않는 태도, 신앙고백과 행동의 일치라는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일상의 성화는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어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삶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생활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을지 몰라도, 신앙생활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 마당을 드나든다고 해서 모두 다 신앙인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닫힌 보수도 문제지만 겉멋만 든 진보도 문제지요. 그러나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은 나눌 수 없는 것, 그것은 단지 인위적인 구별일 뿐입니다. 모이지 않고서 흩어질 수 없고 신앙생활 없이 생활신앙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와 반신앙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저는 일상의 성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함을 종교의 본질로 본 루돌프 오토(R. Otto·1869∼1937)는 거룩함을 인간이 그 앞에서 견디어낼 수 없기 때문에 도망칠 수밖에 없는 신비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에 전적으로 사로잡혀 결코 떠날 수 없는 신비라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은 속된 것에 반대되거나 대립돼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속된 것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낸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속된 것의 영역에서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일상의 성화는 사도 바울에 따르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일상의 성화는 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로서 성취됩니다. 그것은 성령을 힘입어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는 삶,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삶,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삶,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는 삶입니다.

일상의 성화, 그것은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삶,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도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는 삶,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삶입니다.

일상의 성화, 그것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삶,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척하지 않는 삶,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삶, 악에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입니다(롬 12:9∼21).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