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논두렁 시계와 상징조작과 폭정

입력 2017-07-27 17:30

그것은 교묘한 조작이었다.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사건이기도 했다. 국가기관은 실체 조작에 나섰고, 언론은 이를 무차별적으로 퍼 날랐으며, 대중은 그 환영(幻影)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논두렁 시계를 처음 접한 것은 2009년 봄 미국에서 연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직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저인망 수사를 하던 검찰은 확인이 어려운 ‘피의사실’을 연방 흘렸다. 난 쉽게 믿지 않았다. 정치 분야를 오래 취재해온 기자의 촉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 수사는 현 정권의 전 정권에 대한 보복사정의 성격이 짙다고 봤다.

하지만 한방에 무너졌다. 그해 5월 13일 한 지상파 방송은 “시계, 논두렁에 버렸다”는 자극적 제목의 메인뉴스를 내보냈다. 노 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자기 몰래 명품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수사가 시작되자 두 개 모두를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보수, 진보 매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언론이 비슷한 기사를 쏟아냈다. ‘전직 대통령 노무현’은 일순간 파렴치한 잡범으로 전락해 버렸다. “김해 논두렁에 명품시계 찾으러 가자”는 국민적 희롱이 난무했고 그는 방송이 나가고 10일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6년이 흐른 2015년 2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조사에서 명품시계 논란에 대해 “시계 문제가 불거진 뒤 (권 여사가)바깥에 버렸다고 합디다”라고 진술했다는 거다. 이 전 부장은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이) 말을 만들어 언론에 흘렸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새로운 ‘사실’도 알려졌다. 2006년 9월 박연차로부터 대통령 회갑선물이라고 시계를 받은 이는 노 전 대통령 형인 건평씨였다. 건평씨가 권 여사에게 시계를 전달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노 전 대통령이 방송보도와 같은 내용을 진술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상징조작(象徵操作)이라는 게 있다. 실체와 다른 환영을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대중을 움직이는 것을 지칭한다. 대중조작과 유사하다. 이인규의 말이 사실이라면 논두렁 시계사건은 단연코 이에 속한다. 국정원은 박연차가 줬다고 한 ‘시계’와 노 전 대통령의 ‘버렸다고 합디다’는 전언적 진술, ‘논두렁’이라는 공간을 묶어 전혀 다른 환영을 각색해냈다. 전파는 언론이 담당했고, 대중은 즉각 반응했다. “뇌물로 받은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단 말이지…. 그 비싼 시계를 수사가 시작되니까 없앴단 말이지….” 이렇게 말이다.

티머시 스나이더 미국 예일대 교수는 저서 ‘폭정’에서 “특정 상황에서 쓴 말은 오로지 그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말을 그 역사적 순간에서 떼어내 다른 순간에 집어넣는 행위 자체가 곧 왜곡이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미국 대선 기간에 불거진 이메일 폭로 사건을 예로 들며, “더욱 나쁜 것은 대중 매체가 이를 마치 뉴스인 것처럼 다루면서 언론 고유의 사명을 저버렸다는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저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는 공과 사의 차이를 없애 개인의 자유를 박탈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정상 정치에서 끌어내 음모 이론으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왜 논두렁 시계의 진실은 규명돼야 할까. 이 사건은 보수와 진보로 접근할 문제도, 문재인정부의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조사대상으로 선정했다고 해서 전 정권에 대한 보복으로 볼 일도 아니다. 이 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해 말이 왜곡되고, 언론을 통해 뉴스인 것처럼 다뤄지며, 사회 전체가 환영에 휩싸일 경우 ‘폭정(暴政)의 시대’를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번에 그냥 넘어간다면, 누군가는 또 환영을 조작해 대중을 움직이려 들 것이다. 우리가 끝내 실체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