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10년차 A씨(40)는 요즘 지친다. 아내와 맞벌이하며 아이 하나 키우는 게 이렇게 팍팍할 줄 미처 몰랐다. 그나마 직장어린이집이 있어 남들보다 상황이 낫지만,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답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월요일에도 주말에 잘 놀았던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서 열이 난다고 연락이 왔다. 수족구이면 어린이집에 오면 안 된다는 얘기에 겁부터 났다. 어린이집에 못 보내면 누구 하나는 휴가를 써야 하는데 둘 다 예정에 없는 휴가를 쓰기 어렵다. A씨는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다”면서 “맞벌이하며 아이를 키우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데, 우리는 아이가 희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B씨(35)는 오는 10월 고민 끝에 20대 때부터 꿈꿔 온 ‘마추픽추 여행’을 가기로 했다. 어렵게 내린 결심이지만, 쉼 없이 달려온 직장 생활에서 잠시 멀어져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바람이 실현될지 미지수다. 휴가를 1주일밖에 못 써서다. 비행시간만 20시간이 넘는 페루까지 가서 마추픽추만 겨우 다녀올 일정이다. 여행 준비를 할수록 ‘내가 이러려고 휴가를 가나’ 싶다고 한다.
대통령까지 나서 ‘연차휴가를 다 쓰겠다’고 강조하지만, 현실 속 월급쟁이들은 여전히 하루짜리 휴가에도 눈치를 본다. 올해 연차휴가는 다 쓰겠다 다짐하고도 내가 쉴 때마다 더 잦은 야근을 하게 되는 동료들을 보며 고민하는 직장인이 허다하다. 대체 연차휴가가 무엇이기에, 이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26일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고용노동부가 5인 이상 사업체 근로자들의 평균 연차일수를 분석한(2013년 기업체 노동비용조사 기준) 결과 14.2일이었다. 반면 실제 사용일수는 8.6일로 평균 5.6일(39.4%)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근로자들의 평균 근속연수가 6.2년인 점을 감안하면 연차휴가는 17일이 주어져야 맞다.
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은 이런 수치를 근거로 국내 근로자들이 법으로 정해진 기준보다 덜 쓴 연차휴가 일수가 8.4일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를 1일 근로시간(8시간)으로 환산하면 연 67시간이다. 배 연구위원은 “근로시간을 줄이기 위한 법 개정이 난항을 겪고 있는데, 현행법에 규정된 연차휴가만 제대로 써도 연간 근로시간을 67시간 줄이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이마저도 실제보다 축소됐을 가능성이 높다. 고용부가 제시한 미사용률은 회사가 쓴 노동비용을 근거로 분석한 것이다. 회사가 연차휴가를 근로자에게 고지해 휴가 계획을 통지하고도 못 쓴 휴가에 대해 수당을 주지 않는 연차휴가촉진제 때문에 휴가를 다 쓴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서 국내 근로자들은 평균 15일의 연차휴가 중 7.9일(52.3%)만 쓴 것으로 나타났다. 장시간 근로가 만연해 하루 8시간을 넘겨 근무하는 걸 고려하면 휴가 소진으로 줄일 수 있는 근로시간은 더 길어진다.
연차휴가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노동연구원의 2015년 조사 때 ‘연차수당’이 1순위였다. 그러나 점차 인력 부족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문체부 조사에서 1, 2위는 ‘직장내 분위기’와 ‘업무과다 또는 대체인력 부족’이었다.
전문가들은 ‘휴가가 선택 아닌 의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행 근로기준법 60조는 ‘1년간 80% 이상 출근한 근로자에게 15일의 유급휴가를 주라’는 의무 규정이다. 연차휴가촉진제 역시 휴가를 다 쓰게 하려는 원래 취지를 살리도록 해야 한다. 고용부 관계자는 “국내에서 연차휴가사용촉진제를 도입한 것은 돈(수당)과 휴가를 교환하지 말자는 것”이라며 “이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은 최근 사업장별로 개인별 연차휴가 사용일수 등을 기록한 대장을 고용노동부에 보고토록 하고, 연차휴가를 열흘 연속 사용하는 규정 등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다. 정부도 안식월제, 집중휴가제 도입 등을 권고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계 인사는 “한국 사회에서 경영 효율화 명분 하에 한 명이 여러 사람 몫을 하는 게 당연시됐다. 이런 현실을 놔두고 휴가를 가라고만 해선 달라질 수 없다”고 말했다.
글=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연차만 다 써도 年평균 근로 최소 67시간 준다
입력 2017-07-27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