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자신의 결정의 근거가 되는 그 기준이 합리적인가에 대해서는 철저히 따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과 다툼이 계속되는 것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대립은 종식될 수 없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진리다. 진리는 언제나 옳은 것이며 공공성을 지닌 절대적 기준이다. 진리는 시대와 상관없이 불변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진다. 포스트모던시대 세계관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를 가진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검증을 통과한 주장이 아니라면 자신에게는 진리여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포용과 관용이 절대적 진리가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의 치명적인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를 가진 진리는 없다’는 명제 자체만은 절대화한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모순이다. 이 시대의 사상들이 아무리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해도 진리는 살아있다. 악이 살아있는 실체이듯 선은 살아있는 도덕적 실체이며 언제나 옳다. 따라서 선은 진리다. 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는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기준이다.
둘째는 가치다. 가치는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공동체성을 지닌 상대적 기준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가치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합의적 기준이다. 흔히 ‘∼주의’ ’∼이즘(ism)’이라고 이름 붙는 사상들은 대개 가치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전 세계 국가와 민족은 각기 다른 가치 기준을 갖고 있다. 성경이 진리인 까닭은 어느 한 시대의 공동체가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검증을 통과한 책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호도다. 선호도는 때로 옳은 것이 아닌 경우가 많으며 지극히 자의적이다. 공동체의 합의가 필요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선택의 기준일 뿐이다. 진리와 가치의 구분처럼 모호하지 않기에 구별하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가장 완벽한 의사결정은 절대적 진리에 근거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하며 개인의 선호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만족시키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시대가 악할수록 이 기준들의 중요도는 뒤바뀐다.
영적 암흑기였던 성경의 사사시대를 함축하는 표현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이다. 각자 선호도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선조들이 가져왔던 공동체의 가치마저 붕괴된 사회에 대한 설명이다. 악한 지도자는 자신의 선호도를 공동체의 가치로 격상시키고 때로 절대적 진리보다 더 권위 있게 만들어버린다. 독일의 나치정권이 대표적이다. 북한의 세습 정권이 흘러가는 모습 또한 다르지 않다. 선한 지도자는 언제나 자신의 선호도를 내려놓을 줄 안다. 자신의 선호도보다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한다.
20세기 영국의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인 도로시 세이어즈는 ‘도그마는 드라마다’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정욕의 죄에 빠지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했다. 하나는 순전히 동물적 본능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의 파산을 더 중요한 요인으로 봤다. 인생이 따분하고 불만족스럽기에 자극적인 것을 찾고자 정욕에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 현상은 정욕 자체보다 다른 뿌리를 제거해야 치료된다고 봤다. 사회의 부조리 현상보다 철학의 파산 상태로부터 건져내야 한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철학 파산 상태에서는 진리와 가치, 선호도에 대한 구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철학의 파산이 가져오는 혹독한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민심의 선호도가 강하면 가치와 진리도 무시해버린다. 사람들은 각자의 선호도를 모아 절대 기준으로 만든다. 서로의 선호도를 존중하되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해 생각하고 진리가 가장 권위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을 꿈꾸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이재훈(서울 온누리교회 목사)
[시온의 소리] 진리와 가치 그리고 선호도
입력 2017-07-2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