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매 중 여섯째인 소년의 집은 가난했다. 전남 완도 덕동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남의 집에서 김이나 미역을 땄다.
섬마을에는 병원도 약국도 없어 상처가 나면 마른 개똥을 바르는 게 전부였다. 일하다 탈골이라도 되면 평생 불구가 됐다. 어부들이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 풍랑을 만나 수장되는 걸 수없이 지켜보며 결심했다. ‘그래, 이렇게 살다 죽어선 안 되지. 의술로 남들을 돕고 싶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가난한 완도 소년의 꿈
1970년 소년은 또래보다 3년 늦게 고금중학교에 입학했다. ‘3년 늦게 출발했지만 목표지점엔 가장 먼저 가게 인도해주세요.’ 틈만 나면 고금면 화성리장로교회에서 기도했다. 어부 말고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도시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3년 무작정 서울 제기동으로 올라왔다. 신문배달 구두닦이 청소 건물경비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밥벌이를 하면서 고교 졸업장을 쥐는 방법은 검정고시밖에 없었다. 검정고시학원장을 찾아갔다.
“학원비를 면제해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칠판닦이, 수강증 검사, 전단지 배포 등 갖은 일을 하고 수강료를 면제받았다. 버스비가 없어 몇 시간씩 걸어 다녔다. 곰팡이 핀 식빵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학원생활 2년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83년 단국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막노동 체질이었던 청년은 공사판에서 벽돌을 지고 잡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이제남(61) 용인서울병원 이사장의 이야기다.
15년째 90도로 인사하는 병원이사장
경기도 용인 처인구에 있는 이 병원을 21일 찾았다. 병원 입구엔 남색 정장을 입은 183㎝ 훤칠한 키의 남자가 90도로 허리 숙여 깍듯이 인사하고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어깨띠에는 ‘환자를 최고의 고객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잠시 후 막대걸레를 잡더니 병원 로비를 닦기 시작했다. 그의 병원 ‘문지기’ 생활은 15년째다.
건축업을 하던 그는 어떻게 병원을 운영하게 됐을까. 이 이사장은 84년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용인 신갈저수지에서 모래를 퍼서 직접 벽돌을 찍었다. 밤에는 찹쌀떡과 메밀묵을 팔았다. 돈을 모아 경기도 안양과 의왕에 다세대주택을 건축하고 매매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전후해 건설경기에 훈풍이 불었다. 몸에 밴 성실성으로 큰돈을 벌었다. 한밤중에도 공사장에 도둑은 없는지, 빗물이 고이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러 현장에 들르곤 했다. 건축주는 자신의 집처럼 꼼꼼히 살피는 이 이사장에게 선금까지 주며 일감을 몰아줬다.
94년부터는 병원 건축에 손을 댔다. 큰 병원만 5개를 세웠다. 하지만 98년 위기가 찾아왔다. 병원 사무장을 지낸 사람이 용인에서 병원공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공사 중 토지에 압류가 들어오고 채권자들이 빈번하게 찾아왔다. 사무장까지 낀 브로커들이 영안실과 매점 권리금을 받아 챙겨 달아난 것이었다.
지하 2층, 지상 6층 건물공사는 부도를 맞고 중단됐다. 병원 건물이 경매에 나왔다. ‘하나님, 이 병원을 제게 주신다면 환자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훌륭한 병원으로 만들겠습니다.’ 의료인의료인의 꿈을 품었던 그는 그간 벌었던 돈을 쏟아 부었다. 건물은 준공했지만 토지는 경매 중이라 병원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눈물로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막노동꾼, 의사 20명 둔 병원 이사장 되다
우여곡절 끝에 부채를 정리하고 2002년 공사를 완료했다. 8명의 의사를 고용해 2003년 의료법인 효심의료재단을 출범했다. 진료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했다.
돼지나 키우던 외진 곳에 건설회사 사장이 세운 병원을 두고 다들 1년 안에 망한다고 했다. 의사가 주축인 병원의 특성상 이사장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병원은 말 그대로 파리만 날렸다. “이사장실에만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1층 로비로 내려갔지요. 인사를 하고 막대걸레로 바닥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택시 문도 열어드리고 청소, 주차, 차량이동, 화장실 청소 등 잡무를 다 맡았죠. 직원들에게는 병원을 찾는 환자도 의료서비스를 받으러 온 엄연한 고객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어요.”
주변에선 ‘저러다 그만 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병원 이사장이 입구에서 경비원처럼 인사하고 친절하게 대한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2005년 효성의료재단을 설립해 노인요양병원을 개원했다. 2개 기관에 소속된 의사가 20명, 간호사 등 의료 인력만 300여명이다. 일반 병원은 146병상, 요양병원은 170병상 규모다.
용인서울병원에는 유난히 딱한 사정의 환자가 많다. 80년 불의의 사고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완도에서 눈을 감은 어머니 생각에 이사장 권한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남몰래 도와왔다. 그렇게 수십억원의 진료비와 입원비를 지원했고 불우학생들을 위해 수억원의 장학금도 전달했다. 지역 독거노인을 돌보며 차상위계층 이웃들에겐 매년 쌀 400∼600포를 제공하고 무연고자 장례비 지원 사업도 했다. 2015년엔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이 이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이뤘으니 이제는 병든 미자립교회 목회자와 선교사를 보살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장로가 됐다.
이 일을 누가 하랴
이 이사장은 주치의가 병실을 돌기 전인 오전 8시부터 환자들을 만나 애로사항을 청취한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백은혜(33·여)씨는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이해가 된다”면서 “이사장님의 친절한 행동이 환자입장에서 보기 좋다”고 말했다. 이어 “병원 최고 책임자가 저렇게 친절하니 환자 입장에선 마음이 편하다”면서 “병원 입소문이 잘 나 있다. 지역에서 꽤 유명하다”고 덧붙였다. 간호사 김민주(42·여)씨도 “날이 춥거나 덥거나 365일 저렇게 환자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한다”면서 “환자들을 친절하게 맞아주니 소개를 받고 오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밤 10시까지 병원 정문을 지키며 친절하게 응대하는 이 이사장의 모습을 보며 직원들도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김인호(52) 신경외과원장은 “처음엔 이사장님의 ‘돌발’ 행동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줄 알았다”면서 “그런데 쌓이고 쌓여 15년이 되니 의료진도 진정성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방사선사인 박윤호(28)씨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배울 점이 참 많다”고 말했다.
지금도 경차를 고집하는 이 이사장은 오늘도 용인 비전성결교회에서 새벽제단을 쌓는다. 그리고 아침 일찍 출근해 1층 로비에서 인사를 한다. 그의 명찰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일을 나까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용인=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안내직원이 아닙니다 이 병원 이사장입니다
입력 2017-07-24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