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규명을 주장해온 현직 부장판사가 사직했다.
판사 뒷조사 파일 등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규명하자고 주장하던 최한돈(52·사법연수원 28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20일 법원 내부 통신망 코트넷에 ‘판사직에서 물러나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지난 19일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진상조사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지만이라도 밝혀 달라”고 요구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최 부장판사는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 요구를 거부한 양승태(69·2기) 대법원장을 향해 “우리 사법부의 마지막 자정 의지와 노력을 꺾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 사법부는 사법행정권이라는 미명 아래 더욱더 조직화된 형태로 법관들의 자유로운 연구 활동까지 감시당하는 현실 앞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공개되지 않고 은밀히 이루어지는 법관에 대한 동향 파악은 명백히 법관 독립에 대한 침해”라고 지적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명쾌한 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한 국민적 불신은 계속될 것이라고 최 부장판사는 경고했다. 그는 “해소되지 않은 의혹은 앞으로 법적 양심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좇아 사법행정권이나 정권에 순치된 법관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또 다른 의혹을 낳는다”며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최 부장판사는 “80%가 넘는 찬성으로 통과된 전국법관대표회의의 결의조차 가벼이 여겨지고 있음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고도 했다.
최 부장판사는 전국법관대표회의의 현안조사소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다. 현안조사소위는 지난 13일 법원행정처장을 대행하던 김창보(58·14기) 차장을 면담하고 “소위 측이 진상조사 결과를 열람할 수 있는지라도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진상조사의 결과 판사 뒷조사 파일 등 블랙리스트 정황이 파악되지 않았다는 대법원의 결론을 다시 한번 검증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이때 김 차장 측은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17일까지는 진상조사 기록 열람을 허용할지에 대해 답변을 주겠다는 내용의 대화도 서로간에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면담 직후 소위 측은 코트넷에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게시했다. 하지만 최 부장판사가 사의를 표명할 때까지도 전국법관대표회의 측으로는 아무런 답변이 전달되지 않았다. 기록을 못 보이는 이유마저 설명하지 않는 모습에 최 부장판사가 낙심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가 요구된 가장 큰 요인이었다. 법원행정처 컴퓨터의 추가 조사가 압도적으로 의결됐지만 양 대법원장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라고 거부하면서 논란은 계속됐다. 지난 4일에는 남인수(43·32기)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컴퓨터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 필요성을 주장했다. 지난 6일에는 차성안(40·35기)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가 포털 사이트 다음에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관심을 청원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국민적 관심을 호소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최한돈 부장판사, 대법원장 공개비판 후 사직서
입력 2017-07-20 18:55 수정 2017-07-20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