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지난해 채무자 4만명의 ‘연체 꼬리표’를 슬그머니 연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정부 출범 전후로 코드를 맞춘다며 장기·소액 연체채권을 알아서 소각하던 모습과 정반대다. 소액 연체자의 경우 신용회복을 도와 금융생활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이 있다. 때문에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을 모두 소각해 기금을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2일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16개 국내은행이 지난해 3만9695명의 대손상각채권 소멸시효를 연장했다고 밝혔다. 대손상각채권이란 연체한 지 1년이 지난 채권이다. 금융회사는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보고 장부에 ‘손실’로 기록하고 충당금을 쌓는다. 이 채권의 소멸시효를 연장하면 최초 소멸시효인 5년에 더해 10년 이상 채권이 없어지지 않는다. 길어진 소멸시효 기간에 연체자는 정상적 금융거래가 불가능하다.
시효가 연장된 대손상각채권은 2014년만 해도 3만3552명에 원리금이 1조1333억원 수준이었다. 2015년에는 2만9837명, 7384억원으로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 3만9695명에 9470억원으로 늘어났고 올 1분기에는 1만5459명, 원리금 3143억원의 채권 소멸시효가 연장됐다. 이 추세라면 올해 안에 6만명, 원리금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권의 이런 움직임은 새 정부 정책에 발맞춰 연체채권 소각 규모를 늘린 것과 상반된다. 은행들은 2014년까지만 해도 1732명이 진 빚 174억원을 없애는 데 그쳤다. 그러다 지난해 2만9249명의 채권 5768억원을 소각시켰고, 올 1분기에는 9만943명의 채권 1조4675억원을 없앴다. 2분기에도 1만5665명의 채권 3057억원을 소각했다. 새 정부 눈치를 보면서 연체채권 소각 규모를 대폭 늘렸지만, 한쪽에서는 또 다른 이들의 ‘연체 전과’를 늘려온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10년 이상 연체, 1000만원 이하 채권을 소각할 것이라고 공약했었다. 실현되면 채무 1조9000억원이 탕감되고, 43만7000명의 신용이 회복된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한발 더 나아가 민간 금융회사의 장기·소액 연체채권까지 정부가 사들여 소각하는 방안을 내놨다.
여권에선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채권을 모두 소각해 기금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2일 금융연수원 강연에서 “국민행복기금은 금융회사만 배불리는 구조”라며 “기금을 청산한 뒤 잔여 재산으로 공익기금재단을 마련해 서민금융과 자활에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일률적 채무 탕감은 도덕적 해이를 부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원식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회적 일자리 제공이나 세율 조정, 장기채무자의 조건부 탕감 등 다른 방안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앞뒤 다른 은행… 소액빚 탕감하면서 뒤론 소멸시효 늘려
입력 2017-07-13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