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식 <9> 계단·문턱 없는 장애인 위한 교회 세워

입력 2017-07-13 00:00
김경식 목사와 장애인들이 1999년 2월 북한 금강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가운데 목발 짚은 이가 김 목사. 임마누엘집 제공

나는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8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회는 안수 받기 1년 전 강도사 시절에 세웠다. 나는 한국교회가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해 장애인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뼛속까지 느끼며 살았다. 새로 세운 임마누엘교회는 계단이나 문턱을 없앴다. 장애인들 중엔 교회에 가고 싶어도 교회 시설이 불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애인에게 최적화된 교회를 시작하자 지역사회에 숨어살던 장애인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장애인을 위한 사업도 시작했다. 무의탁 장애인을 위한 직업재활교육이었다. 침술과 목각, 공예 등 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지적장애인과 지체장애인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목각과 침술 교육을 받은 장애인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아예 사업체를 차리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임마누엘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비장애인 여성들과도 곧잘 결혼했다. 나와 아내의 결혼 사례가 주변 장애인에게 ‘전염’됐던 것 같다.

우리는 지역사회를 소중히 여겼다. 매년 설과 추석 명절을 앞두고 소외된 장애인 가정과 독거노인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쌀도 나눴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큰 사랑을 받았기에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런 가운데 93년 4월 나는 뜻하지 않게 상을 받았다. 장애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한 공로를 인정받아 39세 나이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것이다. 7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장애인이 된 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고 10년 동안 외판원 생활을 하며 생존의 싸움터에 나가 장애인 복지를 위해 살았다는 이유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출판사 외판 일을 96년까지 했다. 그 후엔 임마누엘집 사역에 몰입했다. 그해 9월 장애인복지시설인 애향원도 개원했다. 애향원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지적장애인들에게 기초생활교육과 상담, 재활치료, 학습지도, 사회적응훈련 등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지금은 복지재단으로 등록돼 있다.

임마누엘집의 활동 중에서 잊을 수 없던 기억은 99년 초 장애인들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간 것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지원을 받아 12명의 장애인이 3박 4일간 참가했다.

여행에는 지체 장애인과 지적 장애인들이 따라갔다. 이들은 구룡폭포와 만물상 등 금강산 절경을 눈에 담았고 북한 사람들의 생활상도 목격했다. 나 역시 천혜의 자연에 압도됐다. 진도 바닷가에만 살다가 가공되지 않은 웅장한 절벽과 기암괴석을 보니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황해도가 고향인 부모님 생각도 났다. 그래서인지 북한 사람들을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지체장애인들은 산 정상까지 가지 못했다. 그래도 ‘북한 땅을 밟아본 게 어디냐’며 기뻐했다. 나 역시 산을 오르다 중간쯤에서 멈추고 바닥에 앉아버렸다. 순간 기도하고 싶어서 “북한 땅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소서”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북한 안내원이 “동무, 지금 뭐합네까”하며 놀라서 달려오기도 했다.

북한쪽 안내원들은 전체적으로 장애인들의 여행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어떻게 왔느냐”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행색이 아직까지 기억난다. 검정고무신에 초라한 바지, 무표정한 얼굴들. 그들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를 향해 “또 오시라요”하며 못내 아쉬운 듯 작별을 고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