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톤베리(Glastonbury) 현대 공연예술 페스티벌(글라스토)이 시작되는 지난달 21일, 런던 빅토리아역에서 오전 3시쯤 버스를 타고 글래스톤베리로 출발했다. 새벽시간인데도 버스 안에는 작은 흥분이 감돌았다. 옆자리에 앉은 영국 여성은 “넌 어디서 왔어? 글라스토 보러 한국에서 왔다고? 와우! 난 런더주얼스(Run the Jewels) 공연이 가장 보고 싶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버스로 4시간여를 달린 뒤 글래스톤베리의 푸른 잔디밭이 보였다. 버스를 탄 사람들은 휘파람을 부르고 “오호∼”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음악팬들의 축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음악, 그 이상의 페스티벌
지난달 21∼25일 영국 남서부 서머싯주 필턴에서 열린 글라스토는 음악팬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대중음악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은 지미 헨드릭스 사망 다음 날인 1970년 9월 19일 시작됐다. 당시 밴드 킹크스(Kinks)를 헤드라이너(대형 음악 공연에서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메인 이벤터)로 10여팀의 공연으로 시작됐지만 현재는 2000여팀이 공연하는 페스티벌로 발전했다. 입장권은 출연 뮤지션조차 발표되지 않은 개최 8개월 전에 판매되는데, 17만5000여장이 판매 시작 10여분 만에 매진된다. 페스티벌 장소는 축구장 500개 넓이인 3.6㎢에 달한다. 메인 무대만 11개, 전체 무대는 100여개다. 10시간 동안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둘러봤는데도 3분의 2 정도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올해 헤드라이너는 라디오헤드(Radiohead) 푸파이터스(Foo Fighters) 에드 시런이었다. 이 중 라디오헤드는 특히 인상적인 공연을 펼쳤다. 이번 공연은 자신들의 음악적 성취를 전 세계적으로 처음 인정받은 ‘OK Computer’ 발매 20주년 공연이었다. 초기 음반에 담긴 노래를 많이 부를 것이란 예고가 된 상태였다. 실험적 색깔이 강한 라디오헤드의 최근 음악에 비해 초기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라디오헤드 자신들이 몽환적인 조명과 영상을 직접 연출했는데, ‘환상적’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엔 잘 부르지 않는 ‘크립(Creep)’도 불렀다. 라디오헤드가 마지막 곡 ‘카르마 폴리스(Karma Police)’를 부르고 떠난 뒤 관객들은 아쉬움에 10여분간 후렴구 ‘아이 루즈 마이셀프(I lose myself)’를 합창했다.
그럼에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공연은 디엑스엑스(The XX)였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베이스를 치는 올리버 심의 말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그는 “글라스토는 정말이지 최고다. 2011년에는 저 뒤에서 비욘세 공연을 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2013년에는 작은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피라미드 스테이지(가장 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그는 단순 음악팬에서 세계 최정상급 뮤지션으로 성장한 것이다. 글라스토는 뮤지션에게 최고의 공연장이었으며 성장의 공간임을 디엑스엑스가 증명해냈다.
글라스토는 음악 중심의 페스티벌이지만 음악만 듣다 온다면 절반도 즐기지 못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글라스토는 정치적인 페스티벌이기도 하다. 창립자 마이클 이비스는 글라스토의 정신을 “음악이 세상을 바꾼다”고 설명한다. 이를 증명하듯 페스티벌엔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이 방문해 정치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스피커스포럼 스테이지에서는 ‘자동화와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다. 페스티벌 주최 측에는 시민단체 그린피스, 옥스팜, 워터에이드가 포함돼 있고, 이들은 곳곳에서 쓰레기 문제, 물 문제,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한쪽에서는 영화를 상영하는데 틸다 스윈튼, 조니 뎁 등이 방문한다. 영화 ‘옥자’ 일반인 프리미어 상영을 한 곳도 이곳이다. 서커스, 차력 쇼, 마술 쇼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글라스토의 한국 청년들
글라스토는 한국 음악팬들에게도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의 주요 항목이다. 올해는 30여명의 한국인이 참가했다. 한국인이 들고 온 ‘이종혁’ ‘이것이 다 문재인 덕이다’ ‘엄마 나 또 왔어’가 쓰인 깃발은 영국 공영방송 BBC에 잡혀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이종혁(27) 백승(32) 이재원(28)씨는 2015년 글라스토에 왔다가 만난 사이다. 재도전 끝에 올해 다시 오게 됐다. 종혁씨는 자신의 이름이 궁서체로 적힌 깃발을 들고 왔다. 그는 “내 이름이 세계 유명 언론매체에 나오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어떤 깃발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내 이름을 적었다”고 말했다. 종혁씨의 꿈은 이뤄졌다. 그는 라디오헤드 등 다양한 공연에서 가운데 앞자리를 선점했고, BBC 카메라에 줄곧 잡혔다.
한국 신스팝 밴드 피터팬 컴플렉스 공연에 앞서 만난 김성민(27) 김소열(27)씨는 영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노란 포켓몬스터 옷을 입고 글라스토에 왔다. 성민씨는 “‘뭐 재밌는 거 없을까’ 고민하다가 런던에서 옷을 구입했다”며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계속 사진을 찍자고 해서 잘 입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염주용(26) 서용준(23) 문현기(27)씨는 대학 밴드 동아리 선후배 사이다. 이들은 글라스토뿐 아니라 스페인 프리마베라, 벨기에 베르히터, 프랑스 몽트뢰 등 유럽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 순회 여행을 할 계획이다. 주용씨는 글라스토에 대한 인상을 “생각했던 것보다 정말 규모가 크다”고 했다.
■ 총선서 선전한 노동당 대표 올 페스티벌 최고 스타로 떠
올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글라스토)에서 최고 화제의 인물은 누구였을까. 앨범 ‘OK Computer’ 발매 20주년을 맞아 공연한 라디오헤드(Radiohead)? 각자 방문해 눈도 안 마주치고 돌아간 오아시스(Oasis)의 리암·노엘 갤러거 형제? 당일에야 공연 여부가 발표된 더킬러스(The Killers)?
정답은 뮤지션이 아니다. 대신 영국 일간지들의 글라스토 기사 제목은 진보정당인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사진)으로 채워졌다. 코빈은 지난달 8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지난해보다 노동당의 의석을 30석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정치인으로, 젊은층에 인기가 많다. 영국 일간지 더가디언은 “정말 올해 글라스토에서는 정치인이 새로운 록스타가 된 것 같다”고 썼다.
실제로 코빈은 글라스토에서 록스타 수준의 인기였다. 화이트 스트라입스(White Stripes)의 ‘세븐 네이션 아미(Seven Nation Army)’는 공식 ‘코빈 합창송’이었다. 공연과 공연 사이 스피커에서 ‘세븐 네이션 아미’가 나오면 관객들은 전주 기타 리프에 맞춰 “오∼ 제러미 코빈”을 합창했다. 한국에 빗대자면 이문세의 ‘붉은 노을’ 전주 키보드 리듬에 맞춰 “오∼ 심상정(정의당 대표)”을 연호하는 셈인데, 대단히 신기한 광경이었다.
24일엔 코빈이 직접 글라스토를 방문해 진보적 가사로 유명한 미국 힙합 듀오 런더주얼스(Run The Jewels) 공연에 앞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정치는 실제로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다. 정치는 우리가 꿈꾸는 것, 원하는 것, 달성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원하는 것을 위한 것이다”라고 외쳤다.
수만 명의 관객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이키 로고 위에 ‘코빈’이라고 인쇄돼 있거나, ‘6월을 메이(5월이라는 뜻도 있음) 총리를 끝내는 달로 만들자(Make June the end of May)’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이 목말을 타고 손을 흔들었다. ‘#저항하라(resist)’, ‘브렉시트는 개소리(Bollox Brexit)’라고 쓰인 깃발도 흔들렸다. 요크에서 왔다는 안나는 “최근 맨체스터 테러, 그렌펠타워 화재 등 때문에 테리사 메이 총리에게 질렸다. 코빈은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글래스톤베리=글·사진 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And 스페셜] 음악과 정치가 어울린 축제… 라디오헤드·코빈에 열광한 英 ‘글라스토’
입력 2017-07-12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