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배삼식 “친일-반일… 이분법 밖의 삶 보여주고 싶었죠”

입력 2017-07-10 21:16
국립극단의 ‘1945’를 통해 해방 직후 민초들의 삶을 따뜻하게 그린 극작가 배삼식. 그는 10일 “이 작품은 염상섭 채만식 등 선배 작가들의 소설과 수필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이 남긴 구술사에 빚을 졌다”고 말했다. 최현규 기자

“우리의 현재를 이루는 가까운 과거를 구체적으로 연극 무대에 형상화하고 싶었어요. 특히 거대담론 밖에서 욕망을 가진 평범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요.”

우리시대 한국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 가운데 한 명인 배삼식(47·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신작 ‘1945’를 발표했다. 지난 5일 개막한 국립극단의 ‘1945’(연출 류주연)는 제목 그대로 1945년 해방 직후 만주의 조선인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일본군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과 미즈코를 비롯해 각각의 사연을 가진 10여명의 인물은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망, 극한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 등을 복잡다단하게 표현한다. 개막한 지 얼마 안됐지만 벌써부터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10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배 작가는 “지난 2011년 백성희 장민호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한 ‘3월의 눈’을 쓰면서 치열한 역사를 가진 개인의 삶에 대해 천착하게 됐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해 현대인의 시선으로 판단하기 앞서 기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학의 경우 그동안 정치경제 등 거대담론을 다룬 거시사가 주류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생활과 문화 등을 다룬 미시사가 많이 나온다. 통계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과 욕망은 미시사에서 잘 보인다”고 덧붙였다.

1988년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그동안 연출가 손진책, 고(故) 김동현과 주로 작업해 왔다. ‘열하일기만보’ ‘하얀앵두’ ‘벌’ ‘먼 데서 오는 여자’ 등 수작으로 꼽히는 다수의 창작극은 물론 ‘벽 속의 요정’ ‘허삼관 매혈기’ 등 각색 작업에서도 창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필력을 보여줬다. 관조적이면서도 따뜻한 문체, 유머와 인간애가 담긴 스토리텔링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1945년 해방 직후라는 시대를 택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 아는 게 너무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쓰인 소설과 수필은 물론 개인의 구술사와 신문기사 등을 닥치는대로 읽다가 ‘전재민 구제소’라는 공간을 만나게 됐다”면서 “친일과 반일, 저항과 부역 등 이분법의 틀 밖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당시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공동체가 공유했던 기억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무모하지만 필요하다. 다만 섣부른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 게 작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배우 김정민 이애린 김정은 박윤희 이봉련 등의 열연이 빛나는 이 작품은 오는 30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