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오종석] 삼성, 인재와 로봇 사이

입력 2017-07-10 17:50

수년 전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서 잘나가던 한국계 미국인 A씨는 삼성 임원으로 전격 스카우트됐다. 초대형 고급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가 제공되고, 고액 연봉을 받으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땐 망설였지만 부모님, 친척들을 가까이서 보며 고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락했다. 세계 최고 기업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초일류 기업 삼성에서 근무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 발휘하며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행복한 한국 생활을 꿈꿨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툴(도구)에 불과했다. 삼성은 국내외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지만 그 인재들은 6개월만 근무하면 로봇이 돼 버린다.” A씨는 9일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고 털어놓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여유 있게 생활하며 좀 쉬고 싶다고 했다.

왜 갑자기 회사를 그만뒀느냐고 묻자 속내를 털어놓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단 삼성이 아직도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에 멈춰 있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혁신기업의 아이디어를 빠르게 수용해서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진척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창조와 혁신으로 ‘퍼스트 무버’(선도자)가 돼야 세계 최고 기업으로 우뚝 서는데 아직은 요원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가장 큰 원인으로 견고한 수직적 조직문화를 꼽았다. 삼성의 기업문화는 아직도 맨 위에서 어떤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최하위 단계까지 기계처럼 아주 단조롭게 일이 진행된다고 한다. 주어진 틀 안에서 ‘더 빨리, 더 열심히’만 일하도록 강요하는 조직문화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아무리 천재적인 인재를 영입해도 수동적이고 타성에 젖은 이런 조직에서는 로봇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다수의 직원들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그는 “다국적 기업에서 6∼7명이 하던 일을 삼성에서는 1명이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연봉은 조금 더 높을지 모르지만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직원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평소 아침 6시 전후에 출근, 밤늦게 귀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오전 9시쯤 출근해 오후 6시 전후 퇴근하며 개인생활은 물론 가정에도 충실할 수 있었던 다국적 기업 회사생활과는 딴판이었다. 늘 업무에 묻혀 살다보니 일과 가정의 양립은 생각할 겨를조차 거의 없었다고 털어놨다. 꼭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회의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삼성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 매출액 추정치 60조원, 영업이익 추정치 14조원을 기록했다. 애플, 구글 등 라이벌 기업의 같은 기간 실적을 모두 제치고 세계 최고 제조업체로 우뚝 섰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세계 최고 기업 반열에 오른 삼성에서 제2, 제3의 A씨가 나온다면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진정한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혁신과 창조가 꿈틀거리고 직원들이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기업문화 정착이 필수적이다.

구글 아시아·태평양 총괄전무인 미키 김은 얼마 전 한 방송에서 “한국에서는 정시 퇴근을 하면서도 ‘일찍 들어가보겠습니다’라고 허락을 받는다”며 일침을 가했다. 요즘 취업을 앞둔 청소년들은 외국계 기업을 선호한다. 직장인 10명 중 7명 정도는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기업문화를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고 한다.

최근 삼성과 현대차, SK, LG 등 주요 그룹은 직급체계를 개편하고 수평적·자율적 호칭을 도입하는 등 기업문화 개선에 나서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 기업이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혁신 조직문화로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 진정한 퍼스트 무버가 되길 기대한다.

오종석 편집국 부국장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