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12년만에야 첫 승소… 문턱 높고 진 빼는 증권집단訴

입력 2017-07-10 05:01



지난 7일 우리나라 집단소송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2007년 발행됐던 ‘부자아빠 ELS(주가연계증권)’ 상품 투자자들이 도이치은행을 상대로 낸 집단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개인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의미 있는 결과이지만 축포를 쏘긴 이르다. 관련 제도가 도입된 지 12년 만에야 첫 승소 확정 판결이 나올 정도로 증권집단소송제가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집단소송제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9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승소 확정으로 피해자 464명은 120억원의 배상금을 나눠 갖는다. 이들은 한국투자증권이 발행한 ELS 상품에 투자했다. 그런데 삼성전자와 KB금융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이 상품의 헤지(위험 회피)를 담당했던 도이치은행이 만기일 하루 전 KB금융 주식을 대량 매도했고 결국 주가가 하락해 투자자들은 손해를 봤다. 이에 투자자 김모씨 등 6명은 2012년 도이치은행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냈고 지난 1월 1심 재판부는 투자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도이치은행은 항소했다가 지난 7일 항소 취하서를 제출했다. 원고 변호를 맡은 한누리 법무법인은 “이번 판결이 집단소송제의 다른 분야 확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자평했다.

2005년 제도가 도입된 후 제기된 증권집단소송은 이번 건을 포함, 9건에 불과하다. 금융감독원이 불공정거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거나 행정조치를 취한 건수가 지난해만 149건에 달한 점을 고려할 때 집단소송제 활용은 여전히 미미하다.

집단소송제의 가장 큰 문제는 소 제기 요건이 까다롭다는 데 있다. 피해자는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거래한 자나 증권신고서를 허위 기재한 자 등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에서 열거해놓은 대상에 한해서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펀드의 부당운용이나 공개매수신고서 허위기재로 인한 피해 등은 집단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

또 피해자는 본안 소송에 앞서 청구 대상이 소송 대상기준에 맞는지를 판단하는 별도의 3심 소송을 거쳐야 한다. 사실상 6심제로, 본안 재판이 열리기까지 몇 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현재 제소된 9건 중 4건이 소송 허가 심리 중에 있다.

전문가들은 집단소송 대상을 ‘금융투자상품’이라는 포괄적 범위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지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관련 보고서에서 “집단소송 적용 대상을 일일이 법에서 지정하는 ‘열거주의’에서 파생상품을 포함한 금융투자상품 전반으로 넓히는 ‘포괄주의’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처럼 재판 전 당사자 양측이 가진 증거를 공개하는 시스템도 요구된다. 집단소송에선 중요 증거를 대부분 피고인 기업 측이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를 공개하지 않아도 큰 제재가 없다. 김주영 한누리 법무법인 변호사는 “미국의 경우 기업이 관련 증거를 공개하면 재판을 더 끌 필요가 없어 대부분 기업과 피해자 간 화해조정이 이뤄진다”며 “우리나라에선 기업이 증거를 움켜쥔 채 최대한 오래 소송을 끌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집단소송에 나서기 주저한다”고 말했다.

글=안규영 기자 kyu@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