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회심인가 개종인가

입력 2017-07-07 00:00

“한국교회는 그간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회심에는 실패한 듯하다.” 최근 어느 포럼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이 오랜 기간 마음 한편에 껄끄러운 가시처럼 박혀있다. 이 문제가 선교계에서도 심각한 사안으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으로 분류된다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후투와 투치라는 두 종족이 서로 100만명 이상을 살상하는 충격적 대학살이 일어났다. 통계치를 단순하게 적용한다면 신자들끼리 80만명 이상을 죽였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복음화 비율이라는 통계에 무슨 가치나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전도와 선교의 목표는 무종교인이나 타종교인을 설득해 ‘우리 종교’로 갈아타게 만드는 ‘개종’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와 인격적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회심’에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은 필경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것보다 더 급진적인 생각의 변화, 즉 회심을 유발한다.

회심은 단순히 종교적 호의나 특혜를 받아들이는 가벼운 행위가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존재와 소유의 권한을 그분에게 내어드리는 진중한 사건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초자연적 심부름꾼이나 복권을 들여놓는 인본주의적 종교행위가 아닌 것이다. 500년 전 개혁자들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한결같이 외친 것도 신본주의 기독교를 회복하려는 의도였다.

선교와 전도는 구원을 추구한다. 구원론도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재정립해야 한다. 영국의 성서신학자 톰 라이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통치할 분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분이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현대 교회의 빗나간 인본주의적 구원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필자에게 신본주의 기독교 영성을 깨닫게 해준 토저(AW Tozer)의 지적처럼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켜(구원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식으로 단순무식하게 전도를 밀어붙이는 관행을 멈추고, 진지하고 신중한 복음 이해와 접근으로 돌아서야 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인간의 죄성은 곧 자기중심성이다. 하나님조차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울 존재로 폄하한다면 결단코 기독교 복음으로 인정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타락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복된 소식, 즉 ‘천국 복음’(마 4:23)이었다. 천국이란 ‘천당’이 아니라(그런 단어는 성경에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예수 믿으면 현세에서 만사형통하고 훗날 천당 간다는 인본주의적 메시지가 아니라, 인류와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통치하신다는 좋은 소식이 진정한 복음이다. 따라서 회심한 자는 종교적 횡재나 특권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죄성을 포기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들어가는 자다. 그래서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첫 메시지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로 소개하면서 회심과 하나님의 통치를 연결한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도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 후 단순한 개종이 아닌 회심의 열매를 요구한다(마 3:2, 8∼9). 히브리인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 해서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된 게 아니라는 경고는 오늘날 제도 교회 안에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구원이 보장된 게 아니라는 말과 유사하다.

회심에 합당한 열매, 곧 나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이 내 주인인 사실이 내 존재와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초대교회가 결신자를 수년간 관찰하고 회개에 합당할 열매를 검증한 후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를 현대 선교와 전도가 다시 배우고 회복해야 한다.

정민영(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