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 허무는 대기업, 철벽 연공서열 깰까

입력 2017-07-06 05:03

LG화학에서는 지난 1일부터 부장, 차장, 과장, 대리 같은 익숙한 호칭이 사라졌다. 대신 책임, 선임이 새로운 호칭으로 자리 잡았다. 직급 체계를 줄이는 새 직급제가 시행되면서 대리는 선임으로, 과장·차장·부장은 책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이 같은 직급 및 호칭 변화는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이래 차츰 확대되고 있다. CJ가 2000년 직급에 따른 호칭을 없애고 이름에 ‘님’자를 붙이도록 한 것이 시초다. 이후 아모레퍼시픽이 2002년부터 CJ와 마찬가지로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SK텔레콤이 2006년부터 직급을 팀장-매니저로 단순화하면서 ‘대기업의 직급 다이어트’ 발표도 이어졌다. 지난해 3월에는 삼성전자가 직급 단순화와 호칭 변화에 동참을 발표한 후 지난 3월부터 시행 중이다.

이 같은 변화의 주된 배경에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통한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저성장이 일반화된 달라진 경영환경 속에서 스타트업처럼 창의적인 사고와 빠른 변화를 해야 한다는 기업의 절박함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반면 국내 기업은 연공서열에 따른 수직적인 문화가 일반화돼 있다는 비판이 많았다. 실제 대한상의가 지난해 3월 발표한 ‘한국기업의 조직건강도와 기업문화 진단 보고서’에는 야근, 일방적인 회의, 불분명한 업무지시로 인한 백화점식 보고 등 권위적인 조직문화의 문제점이 담겨 있다. 세대 간 인식의 차이도 커 ‘건전한 내부 경쟁 및 창의와 혁신이 가능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영역에서 50대 이상과 20·30대 직원 간의 괴리가 컸다.

또 경력 채용이 일반화되고 중간관리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인력 구조 변화 역시 새로운 직급제 등장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정년이 늘어나면서 중간관리자가 많은 항아리 형태로 조직이 바뀌면서 중간관리자 역시 지시나 승인만 하고 있을 수 없는 환경이 됐다.

하지만 새 직급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직급변화 자체보다 근본적인 조직문화 개선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직급이 단순화된 한 기업 관계자는 “직급이 달라졌지만 이전부터 형성된 수직적 문화가 쉽게 없어지긴 힘들다”며 “새 직급으로 부르려고 몇 번 시도하다 이전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회사 내부 의견이나 직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직급을 단순화했다가 기존 직급제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잇따르고 있다.

문형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5일 “제도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윗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글=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