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의혹을 해소해 사법부 신뢰를 회복하자는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법원 내부 전산망 코트넷에 글을 올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의 국정조사를 촉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40단독 남인수(43·사법연수원 32기) 판사는 4일 국민일보를 만나 이같이 말했다. 그는 “같은 방 판사님들을 설득하겠다. 글에 공감하면 옆자리 판사님께 권해주시기 바란다”며 글을 맺었는데, 본보를 만날 때 실제 이 문제를 두고 동료 단독 판사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남 판사와 동료들은 인터뷰 내내 담담히 자신의 사건 기록을 살펴봤다.
남 판사는 “판사 블랙리스트가 문제의 컴퓨터 속에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판사들의 머릿속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의심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일선 법관들이 기획조정실의 생각까지 고려하며 재판하게 된다는 우려가 결국 남 판사의 용기를 불렀다.
앞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법적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법관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열어 조사한다면 교각살우(矯角殺牛·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임)의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전국법관회의의 추가 조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남 판사는 이날 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해당 컴퓨터를 ‘공적 인물이 공적 업무에 사용한 공적 컴퓨터’로 규정하며 “조사의 공익이 사생활 침해의 사익보다 현저히 크다”고 반박했다. 개인적 아이디어 수준의 문서, 미완성 문서 등을 보호해야 한다는 반대 논거는 “초라하다”고 일축했다. 그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행정용 컴퓨터가 판사의 재판용 컴퓨터와 다르다”며 “진행 중인 개별 사건 메모, 결정문이나 판결문 초안 자료가 보관되는 곳이 아니므로 사건 당사자의 권리보호 및 공정한 재판의 전제가 되는 법관 독립의 영역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법부 독립이란 명분이 컴퓨터 조사를 미룰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게 남 판사의 결론이었다. 그는 동료 법관들에게 “이제 눈을 외부로 돌릴 때다. 국정조사와 수사가 있다”고 호소했다. 국정조사 촉구 결의가 관철된다면 검찰까지도 순차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해당 컴퓨터의 공개와 복원이 가능하다고도 남 판사는 역설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이 국회의 민주적 통제의 예외 영역일 수 없다”고도 했다.
남 판사는 블랙리스트 의혹의 규명 여부는 향후 상설화될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위상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국 법관 대표의 80% 이상이 의결해 조사를 요구했는데도 양승태 대법원장이 전면 거부한 점은 향후 전국법관대표회의 위상이 어떠하리라는 점을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남 판사는 우려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의결에 강제력을 부여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점도 국회 국정조사가 필요한 이유라고 남 판사는 강조했다.
남 판사의 글이 코트넷에 게시된 직후 ‘전국법관대표회의’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코트넷 익명게시판에서는 찬반양론이 오갔다고 한다. 이달 열릴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도 남 판사의 심사숙고한 의견이 정식 안건으로 상정돼 공론화될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단독] “공적 컴퓨터… 조사의 공익이 사익보다 현저히 크다”
입력 2017-07-05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