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스 루트를 가다] 평양 대부흥 물결 이은 만주 부흥운동의 요람

입력 2017-07-05 00:1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존 로스 루트’ 답사팀원들이 지난달 29일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교회 앞마당에 모였다.
랴오양교회 초창기 담임이었다가 순교당한 제임스 와일리 선교사의 공덕을 담은 비석으로 랴오양민속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성령 안에서 정의와 평화, 환희의 왕국이 열릴 것을 확신한다.’

1908년 10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사역지로 복귀한 존 로스 선교사가 선양(瀋陽)과 랴오양(遼陽) 등 중국 만주 지역 교회의 변화상을 목격한 뒤 남긴 기록의 일부다. 그가 자리를 비웠던 1년 사이 사역지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달 29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이덕주)와 두루투어가 진행한 ‘존 로스 루트’ 답사팀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랴오양시에 있는 랴오양기독교예배당(랴오양교회)에 도착해 이 같은 의문의 답을 찾았다.

평양에서 만주로 번진 부흥 불길

조나단 고포드(1859∼1936) 선교사. 캐나다장로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이던 그는 1907년 1월, 흥미로운 소식을 접한다. ‘조선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고포드는 그해 8월 평양으로 직접 달려가 ‘영적 부흥’의 현장을 목격한다.

랴오양에서 사역 중이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더글러스 선교사 부부도 고포드를 통해 평양 부흥운동 소식을 접한다. 한발 더 나아가 더글러스는 이듬해 초 랴오양에서 부흥집회를 열어달라고 고포드에게 요청한다.

이듬해 1월 더글러스는 랴오양 지역에서 사역 중이던 창(張) 전도사와 랴오양교회 성도인 후(湖) 집사를 평양에 파송, 부흥운동 분위기를 자세하게 파악한다. 이어 한 달 뒤인 1908년 2월 9일, 고포드는 중국에서 역사적인 첫 집회를 갖는다. 그 현장이 바로 답사팀이 서 있는 랴오양교회였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아담한 정원이 손님을 먼저 맞았다. 1901년 의화단 사건으로 불에 탄 뒤 1907년 다시 지어진 1층 규모의 예배당은 아늑하고 고풍스러웠다. 창문 틀 정도를 제외하곤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주일에는 종탑에 걸린 217㎏짜리 독일제 종을 울린다고 조선족 동포인 김영철(48) 담임목사가 설명했다.

통회자복에서 ‘양심전’ 운동까지

이 예배당에서 열린 고포드의 첫 번째 부흥집회는 어땠을까. 이덕주 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답사팀원들은 109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난 부흥집회 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주일간 진행된 고포드의 집회엔 매일 400명이 넘게 모였다. 집회 초반에는 냉랭한 분위기였다. 집회 다섯째 날, 한 교인이 강단으로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통회자복과 함께 공개적인 회개가 줄을 이었다.

나아가 회심한 기독교인들이 상인 등을 찾아가 자신이 떼먹은 돈을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이른바 양심전(良心錢) 운동까지 벌어졌다. 평양 부흥집회 이후 벌어진 일들이 중국 땅에서도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뤄진 일이라는 고백이 당시 기록에도 나타난다.

만주 부흥운동은 랴오양에 이어 선양 동북부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년 뒤에는 중국의 심장 베이징의 옌징대(현 베이징대) 학생 집회로까지 이어졌다.

쪽복음 성경을 통해 중국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복음이 원산부흥운동(1903년)과 평양대부흥운동(1907년)을 거쳐 다시 중국 만주와 베이징까지 이르는 ‘살아있는 복음’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랴오양교회 초창기 담임이었다가 1894년 청나라 병사의 구타로 순교한 제임스 와일리 선교사의 헌신 또한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랴오양=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