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문’이라는 곳은 특정한 경계 지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유관지 북한교회연구원장) “그보다 마을 내지 공간으로 보는 게 개연성이 높지 않을까요.”(이덕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지난달 28일 오후 중국 단둥(丹東)시 펑청(鳳城)에 있는 변문진(구 고려문)의 한 공터에선 한바탕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고려문이 특정 장소(place)냐, 아니면 지점(post)이냐를 두고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대표주자급 사학자들의 의견이 기탄없이 오갔다. 고려문은 19세기 후반 중국과 조선 양국 사람들이 서로 넘나들던 단둥 지역의 관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우리가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현장 한가운데 서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고려문에 대해서는 더 확실한 고증을 거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제안으로 토론은 일단락됐다.
존 로스와 이응찬의 첫 만남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와 두루투어가 진행한 ‘존 로스 루트’ 답사팀이 방문한 변문진은 한국교회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141년 전, 존 로스 선교사가 바로 이곳 어디쯤에서 조선인 이응찬을 만난 뒤 한글성경 번역이 본격 시작됐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등에 따르면 로스는 두 차례 고려문을 방문했다. 1차 방문 때인 1874년 10월, 로스는 조선인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를 만난 조선인들은 복음보다 기계로 짠 영국산 섬유면제품인 양목(洋木)에 관심이 더 많았다.
2차 방문 때인 1876년 4월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다. 앞서 여러 경로로 조선의 상황을 접한 로스는 한국선교의 꿈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한국어 교습과 성경번역을 담당할만한 인물을 찾고자 고려문을 방문했는데, 하인의 소개로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응찬은 무일푼의 거지나 다름없었다. 소가죽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다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나중에 한국에 올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Corean Primer)를 먼저 펴냈다. 이어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들의 노고로 빛을 본 한글신약성경은 지안 등 중국내 한인촌과 압록강 건너 조선 땅에도 전해졌다. 1885년 언더우드·아펜젤러 선교사가 처음 조선 땅을 밟기 전에 이미 조선인 세례자들이 배출되고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다.
한국교회 부흥의 불씨를 보다
옛 고려문 일대의 흔적은 찾기가 힘들었다. 과거 한인촌에 있던 가옥들은 중국식 형태로 개조된 지 여러 해가 지난 듯했다. 무너지고 신축되는 건물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폭 10m 안팎에 길이가 수백m에 달하는 저잣거리와 버스 종점으로 사용 중인 대형 광장만이 ‘예전에 큰 시장이 섰던 곳이었구나’하고 짐작케 할 뿐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 능선을 바라보면서 로스와 이응찬도 같은 풍경을 접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현장 주변이 친근하게 와 닿았다.
이덕주 소장은 “이곳 어디쯤에서 이뤄진 로스와 이응찬의 첫 만남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끈 불씨가 됐다”며 “복음을 전하려 이곳을 두 차례나 찾은 로스의 간절한 마음을 간직하자”고 강조했다.
단둥=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존 로스 루트를 가다] 존 로스가 조선인 처음 만난 역사적 현장
입력 2017-07-0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