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경계인’ 대학원생의 비애

입력 2017-07-04 05:00

서울의 대학원에 다니는 김모(27·여)씨는 학생과 조교 사이의 ‘경계인’이다. 김씨는 “공부보다 학회 행사가 있을 때 뒤치다꺼리하는 것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오히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가욋일에만 신경쓰다보면 내가 뭐 하러 대학원 다니나 회의감이 든다”며 “조교 업무 말고 공부만 할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말했다.

엄연히 학비를 내고 학교를 다니는 대학원생이 지도교수의 비서나 연구비로 생계를 해결하는 직장인처럼 돼버린 현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좀처럼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교수직으로 진출할 기회는 갈수록 좁아지고 청년 취업난에 내몰리면서 오히려 교수에 종속되는 경향이 더 심해지고 있다.

지난달 인크루트가 대학원생 2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인권보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답변자들은 대부분 폭력·폭언, 차별, 권한 남용 등 부당한 일을 경험했다. 대학원생들은 교수의 온갖 갑질에 시달리면서도 교수에게 묶여 있어 침묵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44%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아무런 대처를 못했다고 답했다. 국가지원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공대 대학원생 김모(24)씨는 “교수의 자잘한 횡령을 목격한 적이 많지만 행여 나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무서워 항상 침묵했다”고 말했다.

교수의 비행이 밝혀지더라도 대학원생은 보상을 받기는커녕 또 다른 피해를 입기 십상이다.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지난달 한 교수가 표절 논란으로 사퇴했다. 이 교수의 지도를 받던 대학원생들은 논문은 물론 향후 진로까지 챙겨줘야 할 지도교수가 하루아침에 없어져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학과 대학원생 한모(27·여)씨는 “학과 차원에서 피해가 없도록 배려를 해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생 박모(31)씨도 “지도교수가 불미스러운 일로 사퇴했는데 학생들이 학계에 남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에서도 한 교수가 연구비 횡령으로 재판받게 되면서 대학원생들이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 대학원생 김모(가명·31)씨는 “최근 과에서 받고 있던 BK21 지원금이 모두 끊길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매달 100만원 정도를 BK장학금으로 받아 왔는데 BK21이 해약되면 소득의 절반을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교수 비리로 대학원생이 그 직격탄을 맞는 상황을 개선하지 못하면 대학원생이 스스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나서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교수 개인의 비리로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이 끊기는 등 피해가 간다면 학과 차원에서 해당 학생들에게 다른 장학금을 우선 배정하는 식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대학원생이 교수에게 지나치게 종속된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실험실 연구원을 겸하는 대학원생 하모(25·여)씨는 자신이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라며 자조했다. 하씨는 매달 연구비로 76만원을 받는다. 생활비로 쓰긴 역부족이다. 하씨는 “나이로는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는 때여서 경제적 부담이 더하다”며 “주변 친구 대부분 연구비나 장학금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혁 서강대 대학원총학생회 회장은 “교수들이 장학금 선정 등 수많은 결정권을 쥐고 있어 대학원생들이 더 꼼짝 못하는 구조적 측면도 있다”며 “해외 대학에선 생활비 등을 지원해 상대적으로 대학원생들이 더 공부에 집중하고, 교수의 간섭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단 대학원생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기댈 수 있는 학내 인권센터를 활성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학내 인권센터는 교수와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전문가로 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대학원생들이 서로 연대해 권리장전 등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대학원생들의 어려움이 사회에서 공론화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글=신재희 이재연 기자 jshin@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