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대학살의 신’ 베로니크역 열연 배우 이지하 “주름만큼 연기력도 깊어졌으면…”

입력 2017-07-03 05:02
연극배우 이지하는 2일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던 또래 여배우들이 최근 TV 드라마 등으로 많이 옮겨갔다. 내 경우엔 전형적인 역할보다 낯설고 신선한 역할에 끌리다보니 연극을 주로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영희 기자

최근 개막한 연극 ‘대학살의 신’을 본 관객이라면 배우 이지하(47)가 궁금해질 것이다. 남경주 최정원 송일국과 함께 출연한 그는 대중적 인지도 면에서 떨어지지만 강렬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2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대학살의 신’은 네 배우의 ‘합’이 잘 맞아야 하는 작품이다. 다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기 때문에 관객들이 재밌게 봐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살의 신’은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통해 중산층의 위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베스트셀러 연극 ‘아트’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또다른 대표작이다. 국내에선 2010년 초연과 2012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다. 이지하는 예술을 사랑하며 아프리카의 인종분쟁에 대한 책을 저술하는 베로니크로 출연한다. 네 캐릭터 가운데 가장 이중적인 인물로 관객의 웃음을 자극한다.

“배역에 몰두하다보면 말투까지 바뀔 만큼 일상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베로니크는 관객에겐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제겐 정말 진지한 인물입니다. 극중 캐릭터에 대한 그런 시선의 차이가 큰 웃음을 유발하는 것 같아요.”

그는 대학로에서 연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배우로 손꼽힌다.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 4학년때 연극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연출가 이윤택의 눈에 띄어 프로 배우가 됐다. 극단 연희단거리패 입단 직후인 1993년 연극 ‘바보각시’의 주역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바보각시’는 이윤택 선생님이 날 위해 만들어준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연기를 잘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내 안의 날것을 끄집어 낸 거였다”고 회고했다.

‘바보각시’로 얼굴을 알렸지만 그는 무대에서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을 느꼈다. 그리고 5년 정도 아예 연극을 떠나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98년 ‘종로고양이’로 돌아왔다.

“김광보 선배의 권유를 받고 망설임 끝에 ‘종로고양이’에 출연했는데, 연극이 다시 재미있어지더라구요.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예민함이 덜해지면서 연극의 공동작업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연극계에 복귀한 그는 연간 평균 3∼4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대학로의 간판 여배우로 자리잡았다. ‘그린 벤치’(2005) ‘오레스테스의 시련’(2008) ‘억울한 여자’(2010) ‘과부들’(2012)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여배우의 40대는 빛나는 나이가 아니다. 그래도 젊음이 사라진 대신 연기력이 남는 것 같다”며 “주름의 깊이만큼 연기력도 깊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살의 신’은 오는 23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글=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