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박모(21·여)씨는 남모를 취미가 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오가며 이른바 빙의글을 읽는다. 한 인기 아이돌그룹의 멤버 A와 사귄다는 가상연애 글이다. 하루 2∼3편씩이나 찾아볼 정도로 푹 빠져 있다. 박씨가 읽는 빙의글에는 여주인공 이름이 없다. ‘○○’ 식으로 비어 있다. 이곳에 자기 이름을 넣으면 된다. 박씨는 “빙의글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A의 여자친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0, 20대 사이에서 빙의 놀이가 인기다. 귀신에 빙의(憑依)된다는 뜻이 아니다. 연예인이나 유명인, 가상 캐릭터에 자신을 투영해 온라인상에서 잠시 다른 사람이 되는 놀이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중학생 조모(13)양은 단체대화방(단톡방)에서 인기 아이돌그룹의 B군으로 변신한다. 20여명이 모인 이른바 멤놀방(멤버놀이방)에서 마치 아이돌 멤버인 것처럼 가상해 “이제야 일어났다”고 글을 쓰면 상대방도 그렇게 받아준다. 조양은 “멤놀방에 있는 20명 중 친구 두 명 빼고는 모두 모르는 사람”이라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30일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멤놀을 검색하니 1581개 관련 카페가 나왔다. 게시글은 4만6571건이었다. 포털 사이트 다음엔 카페 1220개, 게시글 3100건이 있었다. 빙의글도 네이버에서만 카페 464개, 게시글 2만5235건이 검색됐다.
마치 소설 작품처럼 장르와 제목, 필명까지 있었다. 주로 연예인과 연인이 되어 사귄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남자 연예인의 아이를 낳아 육아전쟁을 치르거나 불친절한 이웃이 되어 아웅다웅 다투다 정이 든다는 식의 스토리도 있었다. 인기 빙의글에는 수천개의 댓글이 달렸다. “빙의글 겁나 설레는 거 추천 좀 해주세요”라는 질문에 작가와 작품 이름이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도 있다. 아이돌 그룹별 애플리케이션에 들어가 빙의글을 읽을 수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상상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인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 이런 놀이에 빠지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10, 20대 시절이면 여러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인간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은 강한데 학업이나 취업 부담에 빙의놀이로 욕구를 해소한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거나 범죄까지 연결되는 경우다. 지난해 10월부터 멤놀을 하고 있는 중학생 황모(13)양은 “멤놀에서 23세 남자친구를 만나 가상으로 교제 중이다”고 했다. 남자 쪽에서 먼저 황양에게 사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지난 3월 초등학교 2학년생을 유인해 살해한 ‘인천 여아 살해 사건’의 범인 김모(17)양과 박모(19·여)씨도 캐릭터 커뮤니티에서 역할극을 하면서 만난 사이였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이런 놀이가 계속될 경우 일반적 윤리가 아닌 그들만의 반사회적 윤리로 나타날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면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연습해보는 것은 (빙의놀이의) 좋은 점이지만 나와 그 사람 간의 혼란이 일어나 자아 정체감을 쌓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
“현실이 싫어”… ‘가상세계’서 헤매는 젊은이들
입력 2017-07-01 05:00 수정 2017-07-01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