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은의 씨네-레마] 걸 크러시와 성경 속 여성상

입력 2017-07-01 00:03
5월 31일 개봉한 원더우먼(감독 패티 젠킨스) 포스터. 오른쪽은 지난달 8일 개봉한 영화 악녀(감독 정병길) 포스터.
대중문화의 신조어 중의 하나가 ‘걸 크러시’와 ‘센 언니’이다. 더불어 여성관을 둘러싼 논쟁은 신문 정치, 사회면을 장식하는 주요 이슈가 됐다. 과거의 여성상이 현재시점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반증이자, 새로운 여성상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크러시(crush)’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파열음에 주목해 보자. ‘눌러 부수다, 으스러뜨리다’는 의미의 이 단어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충돌 현상이다. 여성과 관련한 오늘날의 충돌 현상은 페미니즘 이론에 국한된 게 아닌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한 여성에 대한 요구는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원더우먼’과 ‘악녀’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액션영화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액션영화에서 보조 역할을 담당하던 부드럽고 약한 이미지의 여성이 아니다. 남성만큼 강하고 거친 액션을 선보이고 독립적인 여성 역할을 수행한다.

‘원더우먼’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혼란 속에서 미국의 영웅에 대한 갈증은 슈퍼맨과 배트맨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슈퍼히어로를 만들어낸다. 파란색 별 팬츠와 빨간색 뷔스티에(bustier), 긴 부츠를 신은 원더우먼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DC 코믹스를 통해 처음 소개됐지만, 영화는 1918년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영화에는 여성참정권이라는 당시 사회적 이슈도 등장한다. 모계 사회인 아마존에서 원더우먼은 훈련을 통해 여전사로 자라고, 인류에 대한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캐릭터로 분한다.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것은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만이 아니다. 1941년 최초의 필름 느와르(어두운 색채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 ‘말타의 매’ 이후 미국영화는 필름 느와르의 황금기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성장, 전쟁으로 인한 여성인력의 사회진출 등 시대적 상황은 ‘일하는 강한 여성’을 부각시켰다. 이런 배경에서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 femme fatale·치명적 매력을 가진 여성)’이 탄생됐다. 그런 점에서 ‘악녀’는 팜므 파탈의 액션버전인 느와르 장르에 속한다. 액션 장면에서는 강한 여성으로 표현되지만, 서사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비극적이고 수동적인 캐릭터는 ‘원더우먼’처럼 히어로가 아닌 악녀로 나타난 것이다. 자기 의지와 무관한 상황들은 그녀를 비참한 상태로 내몰고 결국 악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킬러로 훈련받는 냉혹한 현실과 개인의 복수심이 그녀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이다.

여성은 한없이 부드럽고 약할 수도, 거칠고 강할 수도 있다. 약함과 강함은 그 자체로 선악의 준거는 아니다. 생존 환경의 요구에 따라 행동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성은 ‘놀라운 여성(원더우먼)’도 ‘악한 여성(악녀)’도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남성의 관점에서 대상화되고 부차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기존의 여성상으론 불가능한 버전이라는 것이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나왔다. 사도 바울은 당시 관습에 기대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구분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2) 남녀의 역할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창조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임세은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