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

입력 2017-06-29 19:46

지난달 24일부터 28일까지 독일 베를린과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열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제36차 ‘교회의 날’ 주제는 ‘개혁과 변형’이었고, 주제 성서연구의 하나는 ‘하갈, 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갈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의 아내 사래(사라의 옛 이름) 소유인 이집트 출신 여종입니다.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자 남편 아브람에게 몸종 하갈과 동침해 집안의 대를 이어가라고 합니다. 하갈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래의 종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갈이 임신을 합니다. 부족장의 대를 이을 맏아들을 임신하니 하갈이 본부인이자 여주인인 사래를 깔보기 시작합니다. 참다못한 사래가 아브람에게 따지듯 일러바치고, 유약한 아브람은 ‘하갈은 당신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그에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학대를 못 견딘 하갈은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갑니다. 수르로 가는 길목, 사막 우물가에서 임신한 몸을 쉬고 있는 하갈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며 살라고. 그리고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여종 하갈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하갈은 처음으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엘로이’, 곧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습니다. 하갈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는 샘의 이름도 그래서 ‘브엘라해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보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절규를 들으시는가? 우리의 일상의 경험은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관심 갖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가 안 보시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보시는가’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창세기(16장 13절)에 나오는 이 말씀을 ‘분명히 나는 여기에서 그분을 보았는데, 그분은 나를 뒤에서 보신 분입니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내가 여기서 뒤에서 나를 보시는 분을 보았단 말인가!’ 또는 ‘나는 나를 뒤에서 살피시는 그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 다시 말해 ‘뒤에서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보시면서 인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보시고 보살피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빛은 앞에서 비추면 눈이 부셔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등 뒤에서 비출 때 오히려 우리는 앞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등 뒤에서 비추면 길 위에 우리 자신의 그림자가 생깁니다. 빛이 인도하는 길 위에도 그림자는 있는 법, 그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빛나고 환한 것은 아닙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도 있는 법, 아니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는 법, 믿음이 언제나 밝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불행을 없애거나 피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 1). 바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이미 본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실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하고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뒤에서 보시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