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그런 법은 없다

입력 2017-06-30 00:04

살인의 조력자를 공범(共犯)이라 한다. 살인의 전말을 알고도 대가를 받고 죄상을 은폐하거나 축소해준 조력자가 있다면 역시 공범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구속된 살인자가 경한 처벌을 받도록 대가를 받고 진실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는 데 조력하는 이를 누구라 해야 할까.

변호사(辯護士)란 법률에 규정된 자격을 갖고 소송의 피고나 원고를 변론하는 직업인을 말한다. 이 규정을 의뢰인이 누구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전의 대가만을 따라, 반성이나 참회나 합당한 처벌과는 상관없이, 다만 무죄나 형벌의 경감을 국가와 다툼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의를 비웃고 진실을 비관케 하는 범죄자의 법률 조력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 해석한다면, 공범과 변호인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일까.

12명에 달하는 인천 초등학생 살해범의 변호인단 논란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도덕적 비판의 여지는 있으나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국가에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들을 매도해선 안 된다는 전문가 인터뷰를 신문에서 읽었다. 놀라웠다. 그의 전문적 견해가 ‘돈도 실력이야’라는 강짜와 유사하게 들렸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는 윤리강령은 물론 상식과 이성에도 부합되지 않는 이런 전문적 견해를 가능케 하는 법은 어디서 나왔을까.

죄형법정주의의 출처는 국가가 죽임 당한 희생자와 유가족을 대리해 살인자에 대한 사적 처벌(복수)을 해줌으로써 공적 정의를 세운다는 정신이지 그 반대일 수 없다. 형률이란 본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동일보복을 원칙으로 했다. 죄와 벌은 등가(等價)다. 아무 죄도 안 짓는 게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길이고 어떤 죄에도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것, 이는 보복의 평형뿐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원리와 도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죄인이 변호를 의뢰한다는 것은 저지른 죄와 비교해 지나친 벌을 받지 않도록 구제한다는 의미다. 현대의 법정에서 피고가 변호사의 법적 조력을 받을 권리는 지나친 사적 보복을 금지한 법률에서 진화된 것이다. 용서라 해도 저지른 양만큼 보상은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세월호와 인천 초등생 살해사건에는 우리사회가 그동안 직시하고 직면치 않은 소위(所爲)에 대한 보복이 들어있다. 가해자는 큰소리치며 변호를 받고 희생자는 오히려 죄인이 돼 다시 희생된다. 세월호가 권력자들의 그늘에서 미필적으로 자행된, 무고한 약자들에 대한 살해행위였다면 인천 초등학생 살해사건은 부모의 재력의 그늘에서 발생된, 무죄한 어린이에 대한 반인륜적 살인놀이였다.

처리과정도 유사하다. 전 국가적 변호인들이 동원됐지 않았는가. 진실을 변호하기보다 어떤 존재감을 관철시키려 든다는 느낌이다. 살인범 학생들의 변호가 보장돼야 함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부모와 가족이, 더 포괄적으론 사회가 보듬어주지 못해 인간으로 자라지 못한 그들의 영혼을 누군가 불쌍히 여기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살해된 어린이와 이미 생이 파괴된 부모들과 그 아벨의 피가 호소하는 정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들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남은 생과 영혼을 위해서라도 진정 참회하도록 인도하는 변호가 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가 길러준 전직 부장검사와 부장판사의 경력들이 돈과 권력의 익명 앞에 냉큼 나서 희생자의 변호역인 국가의 법정신 반대편에 여전히 포진해 있는 지금, 무엇이 적폐일까. 돈이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생각, 돈만 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게 법이라는 생각이 적폐 중 적폐 아닐까.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했다. 목사로서 그 전직 부장님들 가운데 교회의 집사나 장로들이 없기를 바란다.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세상의 변호인들 아닌가. 낮아 겸손한 자기부인 아니면 보이지 않을 생명의 보혜사시고, 높아 오만한 권력자들을 꾸짖어 생명없음을 폭로하시는 인권변호사가 성령 아니신가. 아무리 돈이 좋기로 영혼까지 팔진 말아야겠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이런 규례는 없다.(고전 11:16)

천정근 (자유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