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원하는 복은 오지 않고 뜻밖의 고난은 갑자기 또는 살며시 잘도 찾아옵니다. 사람을 아는 비결은 그가 고난을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있습니다. 좋을 때는 모든 게 좋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의 모습이 그의 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을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유익하고 복된 것으로 정의합니다. 고난은 은혜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가져다주는 은혜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성도에게 고난이 힘든 것은 고통 중에 하나님이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온전하고 정직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고난을 받아 재산과 자녀를 다 잃고 나중에 자신도 병중에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왜 사탄에게 욥의 시험을 허락하셨을까요. 의인이 왜 고통을 받을까요.
하나님은 욥을 믿으셨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믿어주심을 아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성장을 위해 시험을 통과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고난도 있습니다.
이 시험을 견디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을 통해 나를 향한 주의 뜻을 알고 주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 고난을 통과하여 순금같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하신 하나님은 결국 때가 되면 고통 받는 성도를 찾아오십니다. 고난 중에 있는 나를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환난을 받는 것은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며 성도들이 고난을 견디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를 알게 된 바울이 그 고난의 자취를 남겨서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 더 좋은 것을 주시고, 더 좋은 그릇으로 다듬어 가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도 절실히 공감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일부러 고난과 고통의 사람으로 오셨고 그 고통의 근원이 되는 죄에 대한 처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과 영생을 주시려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 고난의 자리를 요구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고난은 무엇일까요.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의 장소는 직장 학교 일터 어디든 내가 있는 그곳입니다. 전도를 위해서는 손해볼 줄 알아야 하고 져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희생이나 수고 없이 영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 우리가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난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위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달아 고난의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저녁 뒤에 아침이 찾아오고 십자가 고난 뒤에 부활의 영광이 찾아오는 이 고난의 신비를 기억함으로써 모든 고난과 시험을 넉넉히 이겨내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호진 목사(김제 주평교회)
[오늘의 설교] 고난의 신비
입력 2017-06-30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