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을 거부하려고 나왔습니다.”
2014년 크리스마스이브 서울고법 302호 법정.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 댓글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직원 이모씨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1심에 증인으로 나와 이것저것 말했는데, (원 전 원장에게) 안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그보다 앞선 2010년 ‘9억원 금품 수수’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여동생 한모씨도 묵묵부답했다. 검찰이 반발했지만 재판부는 “언니(한 전 총리) 형사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며 증언거부권을 인정했다.
증언거부권은 헌법·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증인의 권리다. 본인이나 가족 등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영·미의 자기부죄(自己負罪) 강요 금지 원칙에서 유래했다. 사법절차에 협조할 의무만큼 자신을 지킬 권리도 인정하는 것이다.
26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삼성그룹 전 수뇌부 3명도 모두 증언거부권을 행사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반발했지만 재판은 1시간 만에 끝났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더불어 재판을 받고 있다.
증언거부권은 사실 판사들도 낯설다고 한다. 이날 만난 한 중견 법관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지만 한 번도 (행사하는 걸)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또 다른 법관은 “‘좀 얄밉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며 “특검으로선 다른 방법으로 (유죄를)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삼성의 증언거부권 행사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증언 거부로 실체적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는 한 법관의 말은 계속 맴돈다. 부하 직원의 충성에도 항소심 재판부는 원 전 원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여동생의 침묵에도 한 전 총리는 징역 2년을 확정받고 현재 수감생활 중이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
[현장기자-양민철] 삼성 前 임원들 증언 거부, 득일까 독일까
입력 2017-06-26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