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세습은 하나님 명령이었지요”

입력 2017-06-27 00:00
이호진 김제 주평교회 목사(오른쪽)와 아버지 이탕영 목사가 지난 15일 교회 앞마당에서 농촌목회를 소개하며 미소 짓고 있다.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주평교회 모습.
지난 15일 전북 김제시 모악산 아래 주평마을에 들어서자 닮은 얼굴, 닮은 미소의 부자(父子)가 인사를 건넸다. 이호진(48) 주평교회 목사와 아버지 이탕영(81) 목사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김선규 목사) 소속인 주평교회는 아들이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받은 ‘목회세습’ 교회다. 이탕영 목사가 1989년 개척해 18년 동안 사역했고 아들 이호진 목사가 2007년부터 11년째 강단을 지키고 있다.

목회세습은 ‘부와 권력, 지위의 대물림’이란 지적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대표적 개혁과제다. 하지만 주평교회는 상황이 정반대다. 오히려 ‘재정 적자와 불투명한 미래의 대물림’에 가깝다. 2007년 당시 출석 성도는 20명 남짓. 은퇴를 앞둔 이탕영 목사는 노후는커녕 여생을 보낼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하는 거액의 전별금은 다른 세상 얘기였다. 이호진 목사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 아버지의 거처를 마련하고 자신은 교회 옆 사택에 살림을 차렸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궤적을 두고 보통 사람들은 ‘운명’이란 말을 쓰지요. 제겐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느껴졌습니다.”

이호진 목사는 주평교회에서 사역하기까지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삼형제 중 일찌감치 취업한 형과 공부에 전념한 동생을 대신해 아버지 곁에서 목회를 도왔던 건 이 목사였다. 청소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육을 도맡으며 제자양육에 나서 유·청소년부를 30여명까지 부흥시켰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회를 이을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교회 사역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싫다고 말씀 드렸어요. 어렸을 때부터 농촌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켜봐 왔거든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이 목사는 서울에서 출판광고회사를 다녔고 30대 초반엔 개인 사무실도 차렸다. 신학 공부에 눈을 돌린 건 15년 전 몸을 다쳐 2개월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그동안 삶을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도 ‘삶의 끝자락에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란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면서 “고심 끝에 영혼을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회상했다. 공교롭게도 총신대 신대원에 다니고 있을 때 아버지의 은퇴시기가 다가왔다.

“동기들에게 사역지로서 주평교회를 소개했지만 다들 수도권의 큰 교회에 비전을 두고 있더군요. 기도 끝에 결론 내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주평마을에 심은 복음의 씨를 계속 키워나가기로.”

이후 성도 수는 40여명으로 늘었지만 대부분이 70∼80대다. 이탕영 목사가 정겨운 이웃 대하듯 펼쳐 온 목회는 아들이 부모를 섬기는 듯한 이호진 목사의 목회로 이어졌다. 이호진 목사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 호진이’하고 불러주시던 성도들과 함께 가족처럼 지내는 게 주평교회 사역의 핵심”이라며 “자녀들이 대부분 외지로 나가 있기 때문에 말동무가 돼 드리고 고장 난 선풍기를 손 봐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마워하실 수가 없다”며 웃었다.

하지만 농촌의 목회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교회 개척 후 처음으로 2년 전엔 유·초등부가 없어졌다. 장년 성도들의 평균연령은 갈수록 높아져 간다. 하지만 주평교회에 주어진 소명의식에는 흔들림이 없어보였다.

“양육과 보냄. 이 두 가지가 주평교회의 소명입니다. 아이들을 잘 양육해 도시교회로 보내는 것, 어르신들을 잘 양육해 하나님께로 보내는 것이지요.”

김제=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