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 높은 천장과 유리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13m에 이르는 책꽂이들, 5만여권의 장서에 둘러싸인 공간에서 빈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개관 4주차, 그저 구경삼아 사진만 찍고 가는 이들도 있지만,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멋진 서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의 표정엔 여유와 즐거움이 느껴졌다.
# 지난 17일 서울국제도서전이 한창이던 코엑스. 많은 인원이 몰리며 도서전 표를 사서 입장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이날 도서관을 찾은 관람객은 5만여명. 1979년 코엑스 개관 이래 단일 전시에 몰린 최대 인파로 기록됐다. 전시장 내부에는 이런 분위기를 미처 예상 못한 ‘동네서점’ 주인들이 더 이상 팔 책이 없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분명 책의 위기라고, 종이의 시대는 갔다고, 사람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는데 도서관과 책 전시를 찾은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도서정가제 시행 전 도서전은 책을 헐값에 쓸어 담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정가제 시행 후엔 출판사들의 참여가 저조했고, 출판계 내부에서조차 관심이 없는 행사로 여겨졌다.
그런데 ‘변신’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진짜 변신에 성공한 올해는 달랐다. 책값을 깎아 달라는 관람객들은 사라졌고, 대신 자신에게 맞는 책을 추천해 달라는 독자가 많았다.
사실 책은 표준상품, 즉 어디가나 같은 품질의 상품이다. 그런데 기존 서점에선 팔리지 않던 책이 왜 도서전에선 관객에게 다르게 보였고, 기꺼이 지갑을 열게 했을까. 주최 측은 이번에 작지만 개성 있는, 전국의 동네서점 20곳을 초청해 행사장 한가운데 배치했다. 경남 통영의 ‘봄날의 책방’이나 서울 은평구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강원도 속초 ‘동아서점’ 등은 서점 자체로 눈길을 끄는 스토리가 있었다. 공간의 재배치가 책을 달라 보이게 했고, 독자들을 머무르게 했다. 사진 음악 여행 카메라 고양이 등 특정 분야에 특화된 책을 파는 서점들은 독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똑같은 책이라도 출판사와 서점이 잘만 기획하면 더 많은 독자를 끌어모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맛집으로 소문나면 멀리서도 찾아오듯, 공들여 꾸며진 도서관이 있다면 얼마든지 걸음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책을 독자와 잘 만날 수 있게 한다면 출판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밝으리란 희망도 갖게 됐다.
이번 도서전에서 공간을 재해석하고 흥미롭게 구성하다 보니, 개막식에 참석한 김정숙 여사도 경호 동선을 살짝 벗어나 예정에 없던 부스를 찾기도 했다. 인도계 미국작가 줌파 라히리의 책표지 원본들을 미술관 액자처럼 걸어 놓은 출판사 마음산책 부스였다. 김 여사가 구입한 책은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미국에선 유명하지만 국내엔 생소했던 이 작가가 알려진 건 몇 년 전이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이 추수감사절 연휴에 딸들과 함께 동네서점에서 그의 ‘저지대’라는 소설을 구입하면서부터다. 이후 오바마의 여름휴가지 독서목록에 라히리의 책들이 몇 차례 언급됐고, 그의 선택은 미국은 물론 한국 독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올여름 문재인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대통령이 고른 책에는 자연스레 메시지가 담긴다. 출판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바마가 제임스 설터의 다소 에로틱한 소설 ‘올 댓 이즈’를 독서목록에 넣었던 것처럼, 문 대통령의 리스트에도 의외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늘 추천목록에 오르는 고전 이외 한국작가의 문학작품들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이른 더위가 시작됐다. 다가올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이번 주에는 나만의 휴가지 독서목록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누가 아는가. 올여름 뜻밖의 공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 인생의 책을 만나게 될지. 한승주 문화부장 sjhan@kmib.co.kr
[돋을새김-한승주] 내 인생의 책을 만나는 순간
입력 2017-06-26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