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대신 나온 전문경영인들 ‘재벌개혁 수위’ 탐색

입력 2017-06-24 05:03
오너 일가 대신 전문경영인들만 나왔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4대 그룹 대표들이 2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정책간담회를 열며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김 위원장,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하현회 ㈜LG 사장, 이동근 대한상의 부회장.최종학 선임기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4대 그룹의 첫 소통에서는 ‘합리적’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했다. 문재인정부가 기업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단어다. 기업 스스로 바꾸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스스로 선제적인 변화의 노력을 기울여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어주십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2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챔버라운지에 모인 김 위원장과 삼성전자 등 4대 그룹 전문경영인들의 첫 출발은 밝은 표정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모두발언이 시작되자 긴장감이 흘렀다. 문재인정부의 재벌 개혁 선봉장인 만큼 김 위원장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가 향후 5년의 가늠자가 될 수 있어서다.

공정위원장과 4대 그룹 전문경영인들이 회동한 것은 이명박정부 말기인 2012년 1월 이후 5년5개월 만이다. 김동수 전 공정위원장이 주재했던 당시 간담회에서는 대기업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 관행 개선이 주요 의제였다. 간담회 이후 4대 그룹은 시스템통합(SI)과 광고, 물류, 건설 등 4개 분야 계열사에서 물품 용역 시 중소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열었다. 하지만 기업별로 연구개발 시설 제외 등 단서조항을 달면서 결국 내부거래 근절 의지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5년여 만의 회동에서도 일감 몰아주기는 화제로 꼽혔다. 김 위원장은 1시간가량 비공개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께서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관해 말씀하셨다”며 “이런 부분에 대해 향후 개별적으로, 합리적으로 대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다만 정권 말기와 초기라는 시점의 차이를 봤을 때 4대 그룹은 이번 회동에서 문재인정부의 재벌 개혁이 어느 선까지 겨냥하는지에 관심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재계 입장에서 이날 간담회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의중을 가늠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첫 상견례로 만족스럽다는 평가도 나왔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김 위원장 얘기 들으니 다 타당하다. (삼성전자도) 맞출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예측 가능하고 신중하게 양적인 규제보다는 질적으로 산업 특수성에 맞추겠다고 해 안심하고 돌아간다”고 전했다. 하현회 ㈜LG 사장도 “방향성에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향후 그룹 및 기업들과 개별 만남을 하겠다며 줄기차게 말해 온 ‘재벌 개혁 속도조절론’의 다음 단계를 밝히기도 했다. 노무현정부 때 원조 ‘재벌 개혁 전도사’였던 강철규 전 공정위원장은 4대 그룹 총수를 직접 만나 재벌 개혁과 관련한 논의를 나눴다. 강 전 위원장이 2004년 6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20여분간 독대했던 사례는 지금까지도 재계와 관가에서 회자된다. 당시 위헌 논란까지 대두됐던 공정거래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세종=신준섭 기자, 유성열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