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홀로 부엌에 나와 대충 차린 식탁에 앉은 남자. 표정 없이 숟가락질을 반복하는 그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때 아내가 다가와 묻는다. “자기, 요새 여자 생겼지?”
영화 ‘그 후’는 불륜에 고뇌하는 유부남 봉완(권해효)과 그를 둘러싼 세 여자의 어떤 소란스러운 하루를 비춘다. 출판사 사장인 봉완은 부하직원 창숙(김새벽)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고 만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열렬히 사랑했던 두 사람은 남을 속이고 숨어야 하는 비겁함에 괴로워하다 결국 이별을 택한다.
창숙이 회사를 관둔 뒤 그의 빈자리에 아름(김민희)이 새로 채용된다. 아름의 첫 출근 날, 봉완의 아내 해주(조윤희)가 회사에 찾아온다. 해주는 아름을 남편의 애인으로 착각한다. 다짜고짜 아름의 뺨따귀를 후려치고 욕설을 퍼붓는다. “오해”라는 봉완의 해명에 해주는 “너희 둘이 더러운 짓 한 거 내가 모를 줄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영화 곳곳에는 사랑에 대한 예찬이 담겨있다. “우리만 정말 사랑하면 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사랑해요. …우리 사랑만 하다 죽어요.” 다시 돌아온 창숙은 봉완에게 이렇게 맹세한다. “섹스 중독자, 위선자, 악마”라는 비난의 말에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단, 이런 지점들이 이따금 홍상수 감독 개인의 다짐으로 비쳐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홍 감독의 21번째 장편 ‘그 후’는 실제 연인인 배우 김민희와 네 번째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소재부터 대사까지 두 사람의 실제 상황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적지 않다. 이를 테면, 봉완이 창숙을 그리며 쓴 시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당신은 나의 빛입니다. 당신의 빛 안에서 나는 다시 건강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나는 남자가 되었고, 나는 천국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사랑타령에만 그치지 않는다. 아름의 입을 통해 삶의 본질 혹은 실체와 허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택시를 타고 가던 아름이 평온한 표정으로 차창 밖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떠올리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당당하고 신념적인 아름은 지질한 봉완과 대비된다.
91분짜리 흑백영화로 제작된 ‘그 후’는 홍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친절하고 설명적이다. 특유의 유머 코드와 알코올 냄새 풍기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시간을 왜곡한 편집 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시적 혼란을 일으키지만 인물의 내면 흐름을 표현하는 탁월한 장치가 된다.
제7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당시 대다수 외신은 이 영화에 찬사를 보냈다. “먹먹한 슬픔을 표현해내는 김민희만의 특별한 재능은 홍 감독의 최근 두 작품에서보다 더 풍부해졌다.”(버라이어티) “홍 감독의 계속되는 자기성찰의 여정은 황홀할 것임에 틀림없다.”(스크린 아나키)
홍 감독의 평소 신념처럼,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관객의 몫이다. 오는 7월 6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그 후’ 홍상수의 사랑예찬, 비겁하거나 아름답거나 [리뷰]
입력 2017-06-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