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남북 관계가 경색됐을 때에도 꾸준히 교류를 이어가며 남북 대화의 마중물 역할을 해 왔다.
23일 통일부 등에 따르면 분단 이후 남북 간 첫 공식 스포츠 교류는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1963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1차 체육회담을 통해서다. 당시 남북은 이듬해 열리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단일팀 구성을 놓고 대화를 했다. 비록 회담은 무산됐지만 북한은 도쿄올림픽에서 신금단 선수와 월남한 부친 신문준씨의 이산가족 상봉을 막지 않았다. 이 부녀 상봉으로 6·25동란 이후 늘 적으로만 생각했던 북한 주민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1990년대엔 스포츠가 전면에 나서 남북 해빙 바람을 일으켰다. 1990년 10월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통일 축구대회가 열렸다. 남북이 한 팀을 구성해 세계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이듬해 열린 일본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다. 당시 남북은 팀 명칭을 ‘코리아’로 했고, 한반도기를 국기로, 아리랑을 국가로 채택했다. 당시 남한 현정화와 북한 이분희는 여자단체전에서 중국의 8연패를 끊고 금메달을 차지하는 기적을 일으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남북 공동입장이라는 성과를 냈다.
남북 경색 정국을 푸는 해결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2년 6월 서해교전으로 군사적 긴장 상황이 극에 달했을 때 북한은 9월 열린 부산아시안게임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했다. 2002년 12월 북한의 핵 동결 해제 및 핵 시설 재가동 발표로 한반도가 핵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도 이듬해 8월 열린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에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내려와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대회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부인인 이설주가 응원단에 포함돼 남한 땅을 밟은 게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찾아왔다. 특히 폐막식 때는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 최고위급 인사들이 깜짝 방남해 남북 경색 정국이 해빙 모드로 전환되기도 했다.
글=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1963년 남북체육회담서 황병서 깜짝 방문까지… 남북대화 ‘마중물’ 스포츠
입력 2017-06-23 19:02 수정 2017-06-23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