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문재인다움’으로 승부할 수밖에

입력 2017-06-22 17:41

노무현은 감성의 정치인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봐도 그렇다. 돈이 없고, 너무 힘들다며 여관방에서 마주한 수행비서 앞에서 펑펑 울어버린다. 2002년 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저 잘할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를 외치고 장인의 좌익 경력을 문제 삼는 경쟁자에 대해선 “장인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라고 울부짖는다. 이 대목에서 가슴 뭉클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통령 노무현의 탄생은 ‘노무현다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권 중에도 예상 밖 행보가 꽤 있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탄핵까지 밀어붙였던 한나라당에 권력의 절반을 주겠다고 한 대(大)연정 제안도 노무현이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자 이곳저곳에서 ‘노무현을 뛰어넘으라’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진보 진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마무리하지 못했거나 손을 대지 못한 검찰과 국정원, 재벌 개혁 등 우리 사회 곳곳의 ‘적폐’가 청산되길 바란다. 노무현을 이어 문재인이 완성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격정의 정치인 노무현도 전통적인 지지자들 입장에서 보면 쉽게 용인될 수 없는 역주행을 한 일이 있다. 2004년 6월 이라크 파병 결정과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노 대통령은 지지기반을 크게 상실한 반면 평생의 적대관계였던 보수와 보수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왜 대통령 노무현은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단지 미국이라는 거대 우방의 힘에 밀려서 그랬을까.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이라크 파병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파병 결정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보아도 우리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이후 한·미 관계에서 여러 현안을 처리해 나갈 때마다 자이툰 부대 파병이 지렛대 역할을 계속했다”며 효용성이 큰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FTA 추진에 대한 생각은 더 이성적이다. 노 대통령은 진보주의자들의 개방에 관한 주장이 거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반박하면서 “불확실하지만 뛰어들어야 적어도 낙오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실익 외에도 “우리 국민이 감당해갈 수 있다는 믿음, 역량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이제 대통령 문재인 차례다. 문 대통령은 내주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첫 한·미 정상회담을 갖는다. 국내외에선 사드 배치와 대북 접근법 등에서 이견이 두드러져 ‘외교참사’가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어쨌든 국제무대 데뷔전부터 쉽지 않은 회담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앞으로도 집권 내내 미·중·일·러의 스트롱맨 지도자들과 대한민국의 안위를 놓고 맞대결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삐끗하면 상대방 국가에 발목을 잡힐 수도 있고, 국내에서는 지지층의 강한 저항에 부딪칠 수 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노무현다움’으로 맞섰듯이, 문 대통령 역시 ‘문재인다움’으로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다. 임기 5년에 얽매이지 않고 이 나라가 가야 할 방향과 맞는다면 국민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 이제와 트럼프 대통령이 FTA를 재협상하자고 압박하는 것만 봐도 노 전 대통령의 판단은 맞았다. 이라크 파병으로 역사에 오점을 남긴 이로 기록되더라도 그는 국가를 책임진 최고지도자로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그런 것 같다. 당장은 자기편으로부터 시달리고 욕을 먹더라도 나라의 미래를 보고 결정해야 하는 그런 자리 말이다. 벌써부터 촛불청구서가 날아드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넘어 ‘문재인다운 정치’를 하기 바란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