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거인이 세상을 떠났다. 몸도 거구지만, 그의 족적은 더 컸다. 유럽의회가 있는 프랑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장례식을, 정치인으로 입문한 독일 라인란트팔츠주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한다. 유럽 명예시민인 그는 유럽연합 이름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첫 정치인이라고 한다. 장례행렬이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오갈 만큼 유럽적이기도 하여 더 주목받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소천한 헬무트 콜(1930∼2017) 독일 전 총리 이야기다.
헬무트 콜은 무려 16년 동안 절반은 반쪽 서독에서, 절반은 통일독일에서 각각 8년씩 독일 총리로서 일했다. 한 정치인 죽음 앞에서 독일 국민과 유럽연합 시민은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콜은 잊혀진 듯했다.
콜의 가장 큰 업적은 동서 분단을 극복하고 독일통일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하루에도 수천명씩 동독인이 국경을 넘어오자 독일은 큰 혼란에 빠졌다. 너무 성급히 통일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콜 총리는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일 뿐”이라고 응수했다. 독일의 운명을 ‘통일이라는 열차’ 위에 태운 그는 불확실한 미래를 역사의 현재로 만든 주인공이다.
콜은 독일 통일을 경계하는 유럽의 이웃을 안심시키기 위해 유럽 통합에도 앞장섰다. “전쟁이 다시 유럽을 휩쓰는 것을 막기 위해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유로화 도입 등 유럽 일치를 적극 추진했다. 최근 몇 년 새 유럽통합의 든든한 토대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자 은퇴 후 잠잠하던 콜은 ‘독일이 현금을 쌓아두고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콜 총리의 정치역정 막바지에는 인기가 밑바닥이었다. 반대자들은 총리를 가리켜 난파한 타이태닉이라고 조롱했다. 한 비디오 가게에 붙은 농담이 흥미롭다. “미국은 빌 클린턴과 스티비 원더, 밥 호프, 조니 캐시를 가졌다. 우리는 헬무트 콜을 가졌고, 어떠한 원더도, 호프도, 캐시도 없다.” 유명한 미국인 연예인들의 이름 속에 담긴 세 단어 ‘경이로움, 희망, 현금’을 빗대 헬무트 콜의 무능을 비아냥거린 것이다.
총리직을 마친 콜은 1999년 당내 비자금 스캔들로 위기에 몰리다가 결국 2002년에는 정계에서 은퇴했다. 41년 동안 함께한 아내는 빛 알레르기로 오랫동안 어두운 집 안에서 갇혀 지내다가 2001년 자살했다. 콜의 생애는 빛과 그늘이 무섭게 교차한다.
정치인 헬무트 콜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세운 후임자에 대한 안목 때문이다. 정치적 후계자 앙겔라 메르켈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보수적인 가톨릭을 배경으로 하는 기독민주당에서 개신교인, 그것도 동독 출신의 이혼한 여성이 통일 이후 시대를 이끌 주역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메르켈은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는 분단 이후 동독으로 역이주해 평생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당시 동독에는 목회자가 부족했다.
콜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닌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일의 양대 교회를 존중하고, 거룩한 전통을 신뢰한 사람이다. 그는 보수정당을 대표했으나 정파적 이해를 넘어 ‘산상설교의 정치학’(마 5∼7장)을 구현하려던 독일인 정치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국민을 대표해 페이스북에 조문을 올렸다. 역시 독일 통일을 앞세웠다.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기독민주당 헬무트 콜이 잘 이어받아 결국 통일로 이끌었다고 치하했다. “참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덧붙인 대통령의 말은 그가 직면한 한국 정치 현실의 험로를 떠올리게 한다.
좋은 지도자는 당장 인기가 있고 없고, 높고 낮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훌륭한 지도자라면 국가적 과제 앞에서 정당의 유불리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정치인들은 헬무트 콜, 그 위대한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한반도의 현실을 정직하게 내려다볼 이유가 있다.
송병구 색동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송병구] 위대한 거인, 그가 남긴 발자국
입력 2017-06-22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