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이성규] 82년생 지영과 92년생 준영

입력 2017-06-22 17:39

82년생 김지영씨는 하루아침에 ‘맘충’(아이 키우는 여성을 벌레로 비하한 말)이 된다. 산후우울증을 겨우 벗어난 지영씨가 한 일이라고는 유모차를 끌고 벤치에 앉아 1500원짜리 커피 한잔을 마신 게 전부다. 그런 그를 보고 옆 벤치 남자는 맘충 팔자가 상팔자라고 한다.

92년생 김준영씨는 하루아침에 자산규모 10조원이 넘는 재벌의 최대주주가 됐다. 만 25세인 준영씨가 한 일이라고는 5년 전 아버지로부터 비상장 계열사 지분 100%를 물려받은 것밖에 없다. 증여세로 내야 하는 100억원은 회사가 유상감자 명목으로 은행 빚을 내 이자까지 물어가며 준영씨에게 제공했다. 10조원의 회사를 물려받는 데 준영씨는 자신의 돈 1500원도 쓰지 않았다.

지영씨는 조남주의 소설 속 인물이고, 준영씨는 하림그룹 김흥국 회장의 장남인 실존인물이다. 그런데 헷갈린다. 아무리 봐도 허구와 실제가 바뀐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경제민주주의를 제시했다. 경제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정치뿐 아니라 경제활동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세계적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은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우리는 기업 내에서도 민주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했다. 로버트 달이 말한 문장에서 기업을 재벌로 바꿔보자. 우리 사회의 재벌은 민주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했다. 우리 경제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가장 떨어지는 영역은 재벌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불법과 편법을 넘나들며 민주적 절차를 무시해도 된다는 재벌 오너가의 잘못된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비민주적 행태를 제지하지 못한 사법부와 행정부의 직무유기가 존재한다.

92년생 김준영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27살이던 1994년, 아버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6억원을 물려받았다. 그는 증여세를 내고 남은 나머지 44억원을 종잣돈으로 환상적인 재테크를 통해 삼성그룹의 지배자가 됐다. 이 과정에서 에버랜드와 삼성SDS의 주식 헐값 매입 의혹 등 편법 경영권 승계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은 없다. 재벌의 불법행위를 견제했어야 할 사법과 행정영역의 엘리트들은 능력부족보다는 의지박약이었다. 가까운 예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의 성공적인 합병을 위해 음지에서 힘을 보탰던 이들은 행정부의 엘리트들이었다.

재벌개혁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문 대통령 의지와 재벌개혁 전면에 선 정부 내 인물 면면을 보면 믿음이 간다. 흙수저 출신 김동연 부총리나 시민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얼굴과 발, 몸 닦는 수건이 각각 따로 있는 특급호텔 사우나보다 동네 5000원짜리 대중목욕탕에 더 어울린다. 재벌을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이웃 정도로 여기는 우(愚)를 범할 것 같진 않다. 재벌들은 긴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겠지’란 기대감이 있을 것이다.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던 노무현정부는 후반기에는 삼성 보고서에 의지했고, 박근혜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1년도 못 가 폐기됐다.

문 대통령은 경제민주주의를 위해 양보와 타협, 연대와 배려를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몰아치듯 재벌개혁은 하지 않을 것이며 대기업은 우리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라고까지 했다. 재벌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우려한다는 점에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들에게 또 기회를 주되 과거처럼 늘어져선 안 된다. 촛불민주주의로 세상은 바뀌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밥이고, 밥이 민주주의가 되는 세상은 아직 멀었다. 재벌의 새끼발가락 티눈을 아파하기보다는 매일 8시간 이상 일해도 먹고 살 걱정이 끊이지 않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문재인정부를 기대해본다.

이성규 경제부 차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