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염소 할아버지

입력 2017-06-23 00:04

그는 황해도 사람이다. 황해도는 한국교회사에서 한반도 내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소래교회가 있던 곳이다. 그렇게 개신교 전통이 강한 곳에서 그 역시 일찌감치 개신교인이 되었다. 6·25전쟁 때 그는 한반도 남녘으로 피난을 왔다. 전라도 목포에 자리한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며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북간도 용정 출신의 한 여인이 공생원 교사로 들어왔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이끌렸다. 전쟁도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전남 무안의 한 난민정착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20대의 젊은 목회자는 곧바로 쓰디쓴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38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다. 6·25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안은 채 서로 삿대질하고 싸움질하기 바쁜 사람들 틈에서 그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난민정착촌을 떠난 그가 새로 부임한 곳은 제주도 애월면에 있는 작은 교회였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동생들과 갓난아이까지 일곱 식구가 딸려 있었다. 전도사의 적은 사례로는 생활을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할 수 없이 ‘투 잡’을 뛸 수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한라산 기슭의 억새풀과 갈대를 베어 땔감으로 내다 팔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염소 두 마리를 사서 정성껏 길렀다. 염소 두 마리는 곧 네 마리로 늘어났다. 그러더니 급기야 서른 마리가 됐다. 실로 놀라운 축복이었다.

만약 이게 전부라면, 한국교회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식으로 그의 이야기가 ‘그리하여 저는 부자가 됐습니다’하고 끝났다면, 그저 흔하디흔한 간증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그런 통속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제주도에서 맺은 염소와의 인연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의 열기에 취해있던 무렵 그는 불현듯 호주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시드니 근교에 농장을 구입해 부지런히 사슴을 키웠다. 한국 관광객들은 그의 튼실한 사슴에서 나온 질 좋은 녹용에 열광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젖염소 500마리를 사서 굶주리는 북녘 동포들에게 선물했다. 번식력이 강한 염소만큼 북한의 식량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만능 특효제가 없음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염소 공부를 시켜 주셨구나.’ 그저 하나님의 섭리에 탄복할 따름이었다. 그가 물꼬를 튼 ‘평화의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지금부터 7년쯤 전이다. 시드니우리교회에 출석하던 그는 주일 낮 예배 때 우연히 내 설교를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이번에는 시드니예닮교회에서 내 설교를 들었는데, 그 교회는 그의 아들이 담임하는 교회였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나를 자신의 농장으로 초대했다.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밴 농장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의 ‘설교’를 들었다. 말이 아닌 삶으로 하는 설교, 입이 아닌 손으로 하는 설교를.

평생 통일의 길을 닦던 ‘염소 할아버지’ 최성원 장로님이 작년 봄 하늘로 돌아갔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아버지의 농장에서 ‘공생강좌’를 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는 길은 아버지의 뜻을 잇는 길밖에 없음을 잘 아는 까닭에 마련된 모임이었다. 강연 초대를 받아 다시 찾은 농장, 어디선가 “땅을 사랑하는 자가 하늘과도 가깝다”고 나직이 말씀하시는 최 장로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를 기억하는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는 기이한 연대의식에 사로잡힌 건 분명 하늘의 은총이었다. 그날 우리는 통일의 그림자를 보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서 평화가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