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닭 잡는 칼, 소 잡는 칼

입력 2017-06-21 18:48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하자마자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들이 줄줄이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 공정위는 담합 등이 아니면 가격 결정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들 ‘갑질’ 지적을 받았던 가맹 본사들이 ‘김상조’라는 이름 석 자에 알아서 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 위원장은 23일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과 만난다. 새 정부의 공약사항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자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재벌 개혁을 기업 때리듯 하지 않고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대기업들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벌은 우리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재계는 환영 성명을 냈다. 그런데 표정이 밝지 않다. 김 위원장이 재벌 개혁 속도조절론을 친절하게 설명해도 “지금은 패(재벌개혁안)를 보여줄 상황이 아니다”는 공정위 내부 목소리에 더 신경쓰는 눈치다. 대기업 한 임원은 “닭은 잡았으니 이제 소 잡는 칼을 꺼낼 것”이라고 ‘재벌 저격수’를 맞는 두려움을 드러냈다.

제이노믹스의 상징격인 일자리위원회의 이용섭 부위원장도 재계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박병원 경총 회장은 “문재인정부가 일자리 문제를 국정 최우선과제로 정한 것을 쌍수 들어 환영한다”고 했지만 양측이 주고받은 말엔 분명 간극이 존재했다. 이 부위원장은 “막대한 긍정적 효과를 무시하고 조그만 부작용만 부각하면 정책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가진 쪽의 양보를 주문했다. 경총도 “기득권층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한쪽은 재벌 기득권에, 다른 한쪽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에 방점을 찍었다. 양측은 이미 일자리 논란의 본질이 정규직 비정규직 격차인지, 대기업 중소기업 격차인지로 한 차례 언쟁을 벌인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자리 해법으로 제안한 사회적 대타협은 정부와 재계의 상견례 과정만 봐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이용섭 부위원장은 대타협의 걸림돌로 ‘불신과 불안’을 지목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얘기다.

“20년간 재벌 개혁 활동을 한 만큼 각 기업이 처한 특수성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김상조 위원장의 말을 재계는 “불법·편법 상속과 지배구조 문제, 내부거래 등을 다 알고 있으니까 꼼짝 마라”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양측의 갈등은 개혁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극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 출범 후 재계는 보조를 맞추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다중대표소송제 등을 담은 상법 개정안 입법 과정에선 강하게 저항할 게 뻔하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하루아침에 신뢰가 쌓이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시간도 필요하다. 이용섭 부위원장은 “문재인정부는 속 좁은 정부가 아니다. 신뢰를 얻기 위해 재계와 노동계 인사들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설득과 호소가 필요해 보인다. 김상조 위원장도 재계와의 만남에서 소 잡는 칼이 아니라 환부만 도려내는 수술용 칼이라는 점을 설득시켜야 한다. 상대의 믿음을 얻으려면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벌써부터 정가엔 일자리위원회 등을 통해 국정에 참여한 인사들이 내년 지방선거에 ‘선수’로 출전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몇 달만 있으면 바뀔 파트너이자 정책 책임자에게 재계가 믿음을 주기 힘들다.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재계 내부에선 당장 “몇 년만 버티자”는 말이 나올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기왕에 옳다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한다고 하면 인기에 연연해선 안 된다. 1990년대 말 극심한 고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 개혁을 단행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결국 자신을 지지했던 근로자들이 돌아서면서 정권까지 내줬다. 하지만 진정성이 담긴 개혁안은 정권교체 후에도 계승됐고, 경제정책의 일관성은 글로벌 금융위기 등이 닥쳐도 성장하는 독일 경제의 성공을 낳았다.

한장희 경제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