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기획] ‘제2 안경환’ 혼인무효소송 매년 800건… ‘몰래 혼인신고’ 그물 숭숭

입력 2017-06-21 05:02 수정 2017-06-21 14:24

박형식(가명·35)씨는 5년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이미 3개월 전 헤어진 8세 연상의 전 여자친구가 박씨 몰래 구청을 찾아가 결혼했다고 신고를 했다. 전 여자친구가 혼인신고를 취소하지 않아 박씨는 법원에 혼인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무효 선고를 받기까지 3년이 걸렸다.

이민성(가명·53)씨도 2015년 서울가정법원에 혼인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삼촌과 오희자(가명·72·여)씨 결혼이 무효라는 내용이었다. 치매를 앓다 그해 숨진 삼촌(당시 83)에게는 50억원 상당의 땅과 건물이 있었다. 오씨는 2012년 삼촌 몰래 구청을 찾아가 혼인신고를 하고는 삼촌이 숨지자 땅과 건물을 상속받아 팔아치웠다.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은 “생전 고인이 혼인에 합의할 의사능력이 없었다고 판단해 이 혼인을 무효로 한다”며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안경환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한 계기가 된 일방적인 혼인신고는 40년 전의 일이었지만 현재도 매년 수백건의 혼인무효 소송이 제기된다. 맘만 먹으면 아무나 혼인신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은 부부가 될 당사자가 모두 관청에 나오지 않아도 혼인신고가 가능하도록 문을 열어놨다. 배우자가 될 사람의 신분증과 도장만 있으면 나홀로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 신랑·신부 양측에서 증인을 한 명씩 내세워야 하지만 이마저 신고자가 인적사항만 적어넣으면 된다. 며칠 전 정신질환을 앓던 60대 노인과 가짜로 결혼해 50억원대 재산을 가로챈 혐의로 경찰에 적발된 일당도 안 전 법무부 장관 후보와 똑같이 혼인신고 제도의 이런 허점을 노렸다.

혼인신고는 쉽지만 이를 되돌리기는 어렵다. 혼인무효 소송보다 이혼 절차가 더 간단하다. 이 때문에 김성영(가명·61)씨와 박미경(가명·61·여)씨도 36년 전 이혼 소송을 밟았다. 지난 2월 수원지방법원은 김씨와 박씨에게 이혼 무효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결혼한 적이 없다. 동네 친구였던 두 집안의 아버지가 사돈을 맺자며 당사자들 몰래 구청에 혼인신고를 했다. 두 사람은 허위로 혼인신고를 한 아버지들이 처벌받을까봐 이혼을 택했다. 뒤늦게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혼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진정한 혼인의사 없는 혼인은 무효이고, 따라서 이혼도 무효”라고 판결했다.

20일 대법원 사법통계 연감에 따르면 매년 800건 이상의 혼인무효 소송이 제기된다. 올해 들어서는 지난달까지 325건이 접수됐다.

지난해 신의진 전 의원은 혼인신고 때 당사자 모두가 행정기관을 방문토록 한 법개정안을 발의했지만 19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 5월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용신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서로간 합의 없는 혼인신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의무적으로 출석해 신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현곤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혼인신고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혼인의 법적 효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 혼인신고를 함으로써 효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독일 프랑스에서는 혼인 당사자 두 사람과 증인이 공무원 또는 판사 앞에 출석해 혼인 의사를 밝혀야 혼인신고가 가능하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