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노회찬 정의당 의원에게 건넨 편지가 화제다. 노 의원이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의 칼럼집 ‘밤이 선생이다’를 선물로 전한 뒤 답례로 쓴 편지였다. “새 시대가 열릴 줄 알았는데, 현실은 여전히 아픈 일로 가득합니다. 이제는 ‘그 책임을 어디로 전가할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러서 마음만 공연히 급해집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이 있어, 옛날과는 많이 달라진 세상이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멀리 보고 찬찬히 호흡하겠습니다.”
‘밤이 선생이다’는 국민일보에 실린 칼럼을 포함해 황 선생의 여러 글을 묶은 책이다. 2013년 처음 출간됐을 때도 낙양의 지가를 높였다. 이번을 계기로 또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좋은 글을 더 많은 이들이 읽게 됐으니 좋은 일이다.
며칠 전 광화문 서점에 잠시 들러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다 두 번 놀랐다.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대부분이 문 대통령과 관련된 책이어서 놀랐고, 그 한가운데 12년 전 출간된 책이 딱 꽂혀 있어 또 놀랐다. 1위가 ‘문재인의 운명’이다. 6년 전 책인데 대통령 당선 뒤 초상사진을 크게 넣어 특별판으로 다시 펴냈다.
‘대한민국이 묻는다’ ‘운명에서 희망으로’ ‘1219 끝이 시작이다’ ‘검찰을 생각한다’처럼 문 대통령이 저자이거나 대담자로 참여한 책도 베스트셀러였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문 대통령과 언론관계를 분석한 ‘왕따의 정치학’까지 새 정부를 향한 기대와 응원을 담은 책이 함께 잘 팔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뒤에도 관련 책이 무더기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참여정부의 정치 경제 국방 외교, 심지어 글쓰기 말하기 보고서작성법에 소설까지 나왔다. 왜 그럴까. 참여정부에서는 그만큼 많은 이들이 국정에 참여하고 목격하고 기록했으니 가능한 일이겠다. 대한민국을 토론공화국으로 만들겠다던 노 전 대통령의 바람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나 싶기까지 하다.
이런 베스트셀러 목록에 어울리지 않는 책이 한 권 끼어 있었다. 2005년 교양인 출판사에서 펴낸 ‘파시즘’이다. 이 책이 갑자기 베스트셀러 목록에 역주행한 이유는 정규재 전 한국경제 주필이 유튜브에서 “문재인 정권과 그의 지지자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소개하며 “꼭 읽어보고 자녀에게도 권하자”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천 의도는 다분히 문재인정부에 비판적이지만 책 자체는 진중한 책이다. 정치사학자 로버트 팩스턴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가 쓴 600쪽짜리 두꺼운 책으로 20세기 파시즘을 차분히 해부해 이 분야에서는 교과서로 불린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새 정권을 향한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걸 보니 조금 걱정도 된다. 요즘 같은 때에 서점까지 와서 책을 사 보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진중한 분들일 텐데, 읽을 책이 고작 찬성 아니면 반대밖에 없나? 출범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정부인데 벌써 찬성과 반대를 결정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이 베스트셀러들보다 차라리 2500년 전에 나온 ‘중용(中庸)’이 읽히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김정숙 여사의 편지에서 ‘멀리 보고 찬찬히 호흡하겠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편지엔 이런 구절도 있다.
“앞으로도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 같은 충동이 많이 일겠습니다. 그때마다 화를 내는 대신, 커피 한잔을 뽑아 권하는 지혜와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황현산 선생이 젊은 시절 외국에 주문한 책을 우체국 직원이 내주지 않자 창구를 뛰어넘어가 소란을 피웠다는 에피소드를 인용했다. 문재인 시대는 커피 한잔 뽑아 마시며 책을 읽는 시대가 되면 좋겠다. 이왕이면 베스트셀러보다는 고전으로.
김지방 사회부 차장 fattykim@kmib.co.kr
[세상만사-김지방] 문재인 시대의 독서법
입력 2017-06-15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