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고승욱] 인사청문 시스템이 적폐다

입력 2017-06-15 17:27

우리 국회에서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톰 대슐 전 상원의원의 이름이 한 번쯤 나온다. 그는 연방 상·하원 6선 의원이고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두 차례 역임한 워싱턴의 거물이다. 오바마가 대선 출마를 망설일 때 과감하게 나서라고 조언했고, 캠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부통령과 백악관 비서실장 물망에 올랐지만 건강보험 개혁을 완성하고 싶다며 고사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20일 대슐을 건강보험 주무부처인 보건후생부 장관에 지명했다.

하지만 2주일 뒤인 2월 3일 오바마는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는 “미국에는 평범한 사람과 잘난 사람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2개의 법이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장관 지명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대슐이 세금 14만167달러(약 1억5700만원)를 제대로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장관 인사만큼은 대통령 몫이라는 생각이 확고해 지명자 100명 중 98명이 무난하게 통과한다는 인사청문회에서 걸린 특이한 사례여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미국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대통령을 잘 견제하라고 의회에 ‘임명동의권’을 줬다. 미국 헌법 제2조 제2항 제2호에는 ‘대통령은 외교사절, 연방판사, 연방관리를 상원의 조언과 동의(advise and consent)를 얻어 임명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 아래에는 ‘상원은 하급관리의 임명을 대통령과 각부 장관에게 위임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상원의 동의 없이는 대통령이 아무도 임명할 수 없다고 헌법에 대못을 박아둔 것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하는 8000여 자리 중 대략 1200개가 청문 대상이다. 그래서 상원은 쉬지 않고 인사청문회를 연다.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헌법이 부여한 의무이자 권리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사청문회법은 2000년 6월 제정됐다. 처음에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하라고 헌법에 규정된 국무총리,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감사원장, 대법관이 대상이었다. 그 뒤 장관과 검찰총장 등으로 범위를 점점 넓혀 지금은 대상자가 61명이다. 헌법 제78조에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무원을 임면한다’고 적혀 있다. 인사청문회를 장관으로 확대할 때 일었던 위헌 논란의 근거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5월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에 재고를 요청하는 권고적 성격이므로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금 어느 장관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하느냐를 놓고 시끌시끌하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헌법과 법률을 따르면 된다. 그러고 나서 헌법 정신을 뒷받침할 법률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1776년 건국과 함께 인사청문회를 시작한 미국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인사청문회 때문에 대통령이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는 게 벌써 몇 번째인가. 대한민국에 이렇게 사람이 없냐고 한탄하는 것도 짜증거리다.

19대 국회에서는 인사청문회법 개정안이 무려 23건이 발의됐다. 그중에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발의한 것도 있다. 물론 20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모두 폐기됐다. 아쉬운 일이다. 예를 들어 원혜영 의원은 대통령 직속 인사검증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개인비리가 있는 인사는 아예 청문회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박수를 받았다. 미국에서처럼 사생활과 관련된 사안은 청문회를 열기 전에 국회에서 충분히 검토케 하는 방안을 담은 개정안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약속했다. 청산할 적폐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제도이자 시스템이라고 했다. 지금 인사청문 시스템이 적폐다. 사전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고 국민 앞에 세우는 방식이 잘못됐다. 제도가 미비하면 운용의 묘를 찾아야 하는데 과거 방식을 답습하는 게 구태다. 힘이 있을 때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