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세욱] 한국 축구 망치는 서열문화

입력 2017-06-14 17:42

#1.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어느 날 국내 프로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정 회장이 경기 전 만난 한 국가대표 공격수에게 물어봤다. “혹시 대표팀 경기 도중 손흥민이나 기성용에게 공을 패스해 달라는 식의 얘기를 자주 하느냐.” 그런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답을 들었다.

#2. 한 고교축구팀 감독을 어느 선수 어머니가 찾아갔다. 그는 “우리 애가 고 3인데 경기 출전을 잘 못하고 있다. 왜 3학년이 아닌 1학년 학생을 자꾸 주전으로 쓰느냐”고 따졌다. 감독은 3학년 학생을 경기에 넣고 후배를 뺐다.

축구대표팀이 14일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카타르전에 패하면서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성토가 거세다. 실제 경기 내용을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다. 공수 연결은 매끄럽지 않았고 고질적인 수비 불안은 여전했다. 전날 이란이 조 3위 우즈베키스탄을 잡아줬음에도 호재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오죽하면 네티즌들 사이에 “(경기를) 안 본 사람이 승자”라는 말이 나왔을까.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이후 선수 면면의 경력은 화려해졌다. 당시 주전 중 안정환 설기현 박지성에 불과했던 대표팀 내 해외파 숫자가 지금은 전체의 60%를 넘는다. 외국물 먹은 선수들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대표팀 경기력 향상이 기대됐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들이 소속팀에서만큼 활약을 해주는 경우가 드물다. ‘뻥축구’는 여전하고 조직력은 갈수록 헐거워졌다. 경기 내용만을 볼 때 지금이 최종예선에서 골득실 차로 간신히 본선에 진출한 2014년 브라질월드컵 때보다 더 부진하다. 한국축구는 퇴보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최근 축구계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의문이 다소 풀렸다. 한 관계자는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우리 팀이 16강전에서 패한 것을 두고 “(8강·4강 진출의) 요행을 바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이 바뀐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제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바뀌어야 할 때”라며 위의 사례를 들었다. 요지는 팀 내 소통부재 및 축구계의 권위주의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특유의 선후배 문화다. 한 축구인은 “외국팀을 보면 선수끼리 경기 내내 ‘내게 공을 줘라’ ‘빨리 패스하라’ 하면서 얘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그라운드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의사 표현하는 데 주저한다는 것이다. 대화가 부족하니 선수들의 플레이가 경직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슈틸리케 감독이 격의 없는 스타일도 아니라고 한다. 선수들이 불통의 환경에서 뛴 것이다.

U-20 월드컵이 끝난 뒤 불거진 우리나라 저연령대 선수들의 경기출전 시간 부족 문제도 무관치 않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초등학교는 6학년, 중·고등학교는 3학년 중심으로 경기를 하다보니 후배들의 출전시간이 턱없이 적다”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 선수들의 기량이 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서열문화는 고질화된 ‘한국화’ 현상이다. 개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을 죽이면서 결과적으로 조직의 미래에도 악영향을 주게 된다.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권위와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일사불란함을 가져와 승리하는 시대는 지났다. 올해 미국프로농구(NBA) 챔프전 우승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플레이오프 17경기 중 11경기를 감독 없이 치렀고 모두 이겼다. 선수들은 코트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며 자발적으로 경기를 이끌었다. 이들의 소통 속에 골든스테이트는 ‘사상 최고의 팀’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축구팬들은 그동안 대표팀 내 중국리그 선수들이 실수가 잦다며 ‘중국화’됐다고 손가락질했다. 중국축구가 우리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우리나라가 중국과 카타르에 잇따라 패하자 ‘중국화’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우스워졌다. 대표팀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중국화보다 한국화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