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고승욱] 남북 정상회담

입력 2017-06-13 17:21

2000년 6월 13일 오전 9시45분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특별기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었다. 이 비행기는 50여분 후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부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김 대통령은 15일까지 두 차례 정상회담을 열며 남북관계의 새 시대를 열었다. 1948년 별도의 정부를 구성한 남과 북 정상의 첫 만남이었다. 예상을 깨고 공항에 직접 나온 김 위원장을 얼싸안은 김 대통령을 TV 생중계로 보며 흥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무려 17년 전 이야기가 됐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남북관계는 갑자기 좋아졌다. 2개월 뒤인 8월 15일 이산가족이 서울에서 만났다. 금강산 관광과 민간교류 사업이 확대됐다. 그러나 후유증도 컸다. 2003년 대북송금 특별검사는 현대그룹이 북한에 5억 달러를 송금했고, 이 중에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우리 정부가 북한에 제공키로 약속한 1억 달러가 포함됐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심지어 상당액이 홍콩에 있는 김 위원장의 비밀계좌로 갔다는 진술까지 나왔다. 이때 시작된 ‘대북 퍼주기 논란’은 남남갈등의 진원지가 됐다. 지난달 치러진 조기 대선의 이슈로 떠올랐을 정도다.

북한은 최근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승인된 민간단체의 교류협력 제안 15건을 모두 거부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말라리아 방역 사업, 어린이어깨동무의 보건의료 지원 등 정치색이 전혀 없는 인도주의적 교류인데도 북한의 반응은 차갑다. 남한의 새 정부와 기싸움을 한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실상은 ‘투트랙’을 앞세워 명분만 챙기는 게 못마땅하다는 노골적인 반응이다.

지금 북한은 남한과 거래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거칠게 표현하면 미국을 직접 상대해 크게 한몫 챙기려는데 “그래도 사이좋던 때가 있었잖아”라고 옆구리 찌르지 말라는 것이다. 보수정권 9년만 탓할 게 아니다. 북한의 핵 개발로 남북관계의 전제조건이 달라졌다.

고승욱 논설위원,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