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늦어서 죄송합니다

입력 2017-06-13 18:55

올해 초 랜섬웨어가 내 노트북을 밟고 지나간 후 나는 재건사업에 골몰했는데 그때 도움이 된 건 ‘보낸 메일함’이었다. 적어도 그 메일함에는 내가 어딘가로 발송한 원고들이 변형 없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곳에는 이 계정을 사용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동선이 그대로 있었는데, 그걸 다시 보는 동안 좀 민망한 구석도 발견하게 되었다. 내 변명의 기록이랄까, 열어보는 메일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들러붙어 있는 거였다. 과거형인 듯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도 마감일을 넘기면 메일에 이렇게 쓰곤 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친김에 메일함에서 ‘늦어서 죄송합니다’를 검색해 봤다. 그랬더니 200건가량의 ‘늦어서 죄송합니다’가 화면 가득 소환됐다. 어쩐지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 기분에 더 응용해 봤다. ‘늦었습니다’를 메일함 검색창에 입력해 봤더니 이런! 70건 정도의 ‘늦었습니다’가 소환됐다. 지난 세월, 나는 대략 200번쯤 ‘늦어서 죄송합니다’가 포함된 메일을 보냈고(그러니까 마감에 늦었고), 70번쯤은 ‘늦었습니다’가 포함된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또 늦었다). 검색창에 다른 말들을 입력해 보기로 했다. 늦었지요, 늦었죠, 늦었네요…. 나는 혼자 있었는데도 얼굴이 좀 달아올랐다. 우리 용언의 ‘활용’ 능력에 새삼 감탄하는 동안 모양새는 조금씩 달라도 ‘뿌리’가 같은 말들이 불려 나왔다. ‘늦어서’로 시작되는 어느 가족의 계보를 쭉 훑은 기분이었다.

나는 종종 작가를 부추기는 ‘감’이 두 개고 그중 하나가 마감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른 하나는 영감인데, 어떨 때는 마감이 총알택시처럼 엄청난 스피드로 영감을 태워오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메일함을 계속 뒤지는 동안 이 또한 무색해졌다. 늦어서 미안하다던 내 메일들이 모두 영감을 태운 총알택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각들은 통장 사본이나 신분증 사본 등 단순 서류 배달에 연루돼 있었고, 전혀 창조적이지 않은 그 ‘지각’들이 보란 듯 말했다. 영감은 모르겠고, 우릴 늦게 보낸 건 단지 습관이라고!

글=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