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까지 아시아 3대 금융허브로 발전해 나가고자 합니다.”
2004년 12월 유럽의 금융허브인 영국 런던을 찾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버킹엄궁 선언 내용이다. 자본시장 장벽을 무너뜨려 한국을 동북아 금융의 중심으로 만든다는 포부였다. 3년 뒤 2007년 7월 국회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안을 의결했다.
법안 시행 후 자본시장에선 구조 개편이 일어났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현재 득보다 실이 많다는 평가가 다수다. 의도와 달리 자본시장을 키우기보다 외려 움츠리게 했다는 지적이다. 그렇잖아도 은행에 쏠려 있던 금융시장의 균형은 법안 시행 뒤 더욱 기울어졌다.
한반도판 ‘금융빅뱅’
노무현정부 핵심 정책 중 하나인 자본시장통합법은 자본시장 활성화를 목표로 은행법, 자산운용법, 신탁업법 등 6개 금융 관련법을 합쳤다. 1986년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단행한 ‘금융빅뱅’이 모델이다. 당시 조치로 영국에서는 대규모 구조조정 등을 통한 초대형 금융그룹이 형성됐다. 노무현정부도 같은 변화를 목표로 했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지금 최우선 목표였던 자본시장 확장 효과는 없었다는 평이다.
결정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안정성이 중시되면서 자본시장은 증권사가 아닌 은행 중심으로 재편됐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법안 취지와 달리 자본시장이 기형적 구조로 변형됐다고 비판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12일 “금융지주 중심으로 은행자본만 크게 강화됐다. 은행은 업무영역이 대폭 늘었지만 100개가 넘던 중소형 증권사는 절반으로 줄었다”고 토로했다.
자본시장 확대? 현실은 ‘8년 박스피’
업계에서는 은행권 중심으로 재편된 자본시장 구조가 ‘박스피’(코스피지수가 일정 폭 안에서만 오르내리는 현상)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본다. 한 업계 종사자는 “증권사를 자회사로 데려간 은행들이 자사 업계 방식대로 수익 안정성만 추구하고 헤지(위험 회피)에만 공들여 공격적인 투자가 없었다”면서 “금융지주 밑에 들어간 증권사들은 지주사 회장 눈치만 보는 형편”이라고 불만을 털어놨다.
법안 결과물인 초대형 투자은행(IB)은 아직 본격적인 업무도 시작하지 못했다. 반면 예고된 업계 구조조정 칼바람만 매섭게 몰아쳤다. KB증권 전신인 KB투자증권은 지난해 12월 50명, 합병된 현대증권은 11월 170명이 희망퇴직했다. NH투자증권에선 2014년 합병 과정에서 총 600여명이, 지난해 10월에도 154명이 희망퇴직했다. 매물로 나온 하이투자증권, SK증권 등이 팔리면 또 다른 대규모 인력 감축이 불 보듯 뻔하다.
“지금이라도 법 취지 살려야”
금융권에선 새 정부의 자본시장 정책에 대해서도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동북아 금융허브’를 내세운 노무현정부에 이어 규제완화를 밀어붙일지, 혹은 금융소비자 보호를 기치로 규제를 강화할지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취임 뒤 한 달이 지났지만 문재인정부는 금융위원장 인선도 미루고 있다. 이인호 서울대 교수는 “지금 정부는 금융은 뒷전”이라면서 “재정정책만 얘기할 뿐 관련 공약도 별로 없다”고 봤다.
학계는 새 정부가 자본시장통합법의 취지를 살린 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본다. 김용재 고려대 교수는 “금융투자사업자를 배출하려면 영업행위 규제를 대폭 완화했어야 했는데 자본시장통합법은 그렇지 못했다”면서 “법은 원칙 중심으로 놓되 세밀한 규제는 하위 규정으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자본시장통합법의 취지와 구조는 나쁘지 않다”면서 “법을 현 정부에서 손질한다면 소비자 이해관계에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안전하고도 원활한 투자를 유도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효석 안규영 기자 promene@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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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13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