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책이나 드라마에서 극적인 전환을 예고할 때 흔히 나오는 문장이다. 요즘 인기 있는 문화콘텐츠를 보면 실감이 난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여성주의적 시각이나 고민을 담은 책 드라마 영화 등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이 현상을 두고 여성들의 ‘문화심’(文化心)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문화심이란 표심(票心)에서 유래한 조어로 문화콘텐츠에 대한 선호를 뜻한다. 대표적인 책으로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을 들 수 있다. 서른네 살 평범한 한국여성 김지영의 생애를 담은 이 소설은 김지영이 가정 학교 직장에서 겪는 성차별을 르포 스타일로 묘사한다. 지난해 10월 출간된 이 책은 출간 7개월 만에 판매 부수 10만부를 돌파했다.
민음사 관계자는 12일 “여성 문제가 이 사회의 주요 이슈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주변에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권했던 것이 가장 큰 인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1월 출판사가 만든 카드뉴스는 댓글 1482개, 공유 2789회를 기록했고 이때부터 책은 매일 300여부씩 팔려나갔다.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즘 도서가 꾸준히 읽히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서점 ‘예스24’와 ‘알라딘’만 보더라도 2016년 ‘여성·젠더’ 분야 도서 판매권수가 전년에 비해 각각 2, 3배 이상 늘었다. 이에 따라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등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KBS 2TV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연출 이재상)는 남성 중심의 결혼제도에 반기를 드는 적극적 여성 변혜영(이유리)이 나온다. 변혜영은 연인에게 ‘결혼 인턴 1년’을 제안한다. “나는 여전히 두려워. 우리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 있을지.… 1년 간 인턴 기간을 (갖자)”고 말한다. 고부 갈등을 포함해 행복의 장애 요소를 검토한 뒤 결혼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상해’는 시청률 30%대를 기록하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 요소는 여러 가지이지만 결혼과 동거에 대한 여성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대변하는 이유리 캐릭터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 시청자는 “드라마 내용이 매우 현실적이고 (이유리가) 연기를 잘 해서 마음에 와닿는다”고 말했다.
한국영화 중에는 지난 8일 개봉한 ‘악녀’가 눈길을 끈다. 살인병기로 길러진 킬러 숙희(김옥빈)가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찾아 복수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액션물이다. 나흘 만에 관객 45만여명을 모았다. 최근 극장가에서 흥행몰이한 할리우드 영화 ‘원더우먼’은 여성감독이 연출한 첫 여성 히어로물이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여성 원톱 캐릭터로 역대 여성감독 작품 중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극장에서 (여성 원톱인) 영화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원더우먼’이나 ‘악녀’를 보는 여성 관객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며 “영화 표를 사는 행위에도 ‘표심’이 있다고 보면 지난해 강남역 사건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표심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시적 현상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드라마평론가 윤석진씨는 “데이트 폭력 사건 등이 일어날 때 페미니즘 문화콘텐츠가 반짝 인기를 얻곤 했다”며 “(여성주의적 문화콘텐츠가) 수용자의 비판적 의식과 행동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여주인공 모습은 제자리걸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주화 권남영 기자 rula@kmib.co.kr
페미니즘 무장… ‘센 언니들’의 질주
입력 2017-06-13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