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갔다던 남자 테니스 황제들이 올 시즌 메이저대회를 차례로 휩쓸며 ‘부활 스토리’를 써나가고 있다. 노장 로저 페더러(36·스위스)가 지난 1월 호주오픈 왕좌에 오른데 이어 이번에는 페더러의 최대 라이벌인 라파엘 나달(31·스페인)이 프랑스오픈을 정복했다. 2000년대 중후반 세계 테니스계를 양분했던 전설들이 올해 나란히 재기에 성공하면서 향후 이뤄질 이들의 클래식 매치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도 한층 높아졌다.
11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의 롤랑 가로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결승. 클레이코트에 강해서 ‘흙신’이란 별명을 가진 나달은 상승세의 스탄 바브린카(스위스·세계랭킹 3위)를 상대로 2시간 5분 만에 3대 0(6-2 6-3 6-1)으로 완승을 거두며 대회 개인통산 10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한 선수가 특정 메이저대회에서 10번 우승을 거머쥔 것은 남녀 단식 통틀어 나달이 처음이다. 2005년 19세의 나이에 처음 프랑스오픈 우승을 차지했던 나달은 12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노장 소리를 듣게 됐지만 클레이코트에서의 압도적인 위용은 여전했다. 나달은 이번 대회 1회전부터 결승까지 7경기를 치르는 동안 상대에게 한 세트도 내주지 않는 무결점의 기량을 선보였다.
나달은 지난 2년여간 손목 부상과 슬럼프가 겹쳐 하락세를 탔다. 나달은 2014년 프랑스오픈 우승 이후 지난해까지 4개 그랜드슬램 대회(호주·프랑스·US오픈·윔블던) 4강에 진출하지 못했다. 특히 지난해는 최악의 시즌이었다. 호주 오픈 1회전에서 탈락했고 US오픈에서는 16강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자신의 주무대라 할 수 있던 프랑스오픈에서도 3라운드에서 부상으로 기권했고 윔블던은 불참했다.
테니스계에서는 “이제 나달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나달은 올해 다시 기지개를 켰다. 공교롭게도 평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페더러의 부활과 맥을 같이 했다. 나달은 지난 1월 호주오픈에서 페더러와 8년 만의 메이저대회 결승 상대로 만났지만 풀세트 접전 끝에 아쉽게 패했다. 그러나 가능성을 한껏 보여준 나달은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몬테카를로 롤렉스 마스터스과 바르셀로나 오픈, 무투아 마드리드 오픈에서 차례로 우승했다.
마침내 2014년 이후 3년 만에 프랑스 오픈 정상 탈환까지 성공했다. 나달은 이번 대회에서 완벽한 풋워크와 공격적인 서브, 공에 회전을 준 왼손 포핸드 스트로크 등으로 자신이 강세를 보였던 클레이코트에서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나달은 “어느 대회든 최선을 다하지만 롤랑 가로스 스타디움 코트에 서면 용기와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다. 이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나달은 이번 우승으로 개인 통산 15번째로 메이저대회 정상에 올랐다. 이는 메이저 대회 우승을 18차례 차지한 페더러에 이어 단독 2위 기록이다. 페더러는 체력 등을 고려해 이번 프랑스오픈에 불참했지만 다음 달 3일 개막하는 시즌 세 번째 그랜드슬램인 윔블던 대회 우승을 정조준하고 있다. 페더러는 12일 나달의 프랑스오픈 10번째 우승에 대해 SNS에서 “그저 놀라울 뿐(simply incredible)”이라고 축하했다. 페더러 역시 호주오픈에 이어 3월 BNP 파리바오픈, 4월 마이애미오픈 등 큰 대회를 연달아 제패했다.
완벽한 귀환을 알린 테니스계의 레전드 나달과 페더러가 윔블던 대회에서 다시 한 번 팬들에게 놀라움과 향수를 안겨줄 맞대결을 하게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흙에서… 나달, 10번째 나팔
입력 2017-06-12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