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못받고 군무로 은퇴한 무용수 이야기

입력 2017-06-12 05:00
지난 3월 국립발레단을 그만 둔 발레리나 이향조(왼쪽)와 올해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그를 위한 무용 ‘스텝 바이 스텝’을 만든 안무가 김용걸. 두 사람이 9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작품 연습을 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예술의전당 제공
발레는 ‘젊음의 예술’이다. 극소수 예외를 빼곤 무용수 대부분이 체력 문제로 40세 전후 발레단에서 은퇴한다. 게다가 다른 장르에 비해 유난히 주역에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는 점에서 냉혹하다.

발레단에 입단한 무용수라면 누구나 주역이 되어 관객의 박수갈채를 꿈꾼다. 하지만 거의 군무로 머물다 은퇴하기 마련이다. 관객들은 무대 중앙의 주역에 집중할 뿐 그 뒤편의 군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특히나 군무를 이루는 한 명 한 명의 무용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2004년 9월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가 공연했고 영상으로도 제작된 ‘베로니크 두아노’는 군무 무용수의 애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군무와 솔리스트의 중간단계 ‘쉬제’로 은퇴를 앞둔 두아노가 연습복만 입은 채 혼자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중간중간 무용수로서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었던 춤들을 직접 추기도 한다. 현대무용 안무가 제롬 벨이 만든 이 작품은 감동적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영상은 무용 및 다큐멘터리 애호가들 사이에 꼭 봐야 할 작품 리스트에 올랐다.

올해 7회째인 대한민국발레축제(25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오는 17∼18일 공연되는 ‘스텝 바이 스텝’은 ‘한국판 베로니크 두아노’가 될 것 같다. 이 작품은 안무가 김용걸(44)이 지난 3월 국립발레단에서 세컨드 솔리스트로 은퇴한 후배 발레리나 이향조(38)를 위해 만들었다. 세컨드 솔리스트는 군무와 솔리스트 배역을 오가는 무용수로 ‘쉬제’와 유사하다.

경북 구미 출신인 이향조는 다소 늦은 나이인 중학교 2학년 때 발레에 입문했다. 초등학교 시절 TV에서 발레를 보고 매료됐지만 부모의 반대와 발레학원이 없는 지역적 한계 때문에 늦어졌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국내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으며 2002년 국립발레단 연수단원을 거쳐 이듬해 정단원이 됐다. 꿈에 그리던 국립발레단에 들어왔지만 그는 15년간 주로 군무로 활동하다 은퇴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1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분수대 앞 광장에서 그가 김용걸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국립발레단 공연 캐스팅에서 제외돼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국립발레단이 일반인을 위해 진행하는 발레교실 강사가 그의 주된 일. 잇단 캐스팅 제외는 현역 단원인 그에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용걸은 그를 위해 ‘타임 투 리브’(떠나야 할 때)라는 제목의 소품을 만들었다. 그러다 올해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신작을 선보일 기회가 생기자 아예 그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스텝 바이 스텝’을 만들었다.

9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김용걸은 “나도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한동안 군무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향조의 심정을 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각광받았던 김용걸은 2000년 파리오페라발레에 군무로 입단, 2005년 쉬제로 승급한 뒤 2009년 퇴단했다.

이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과연 어디까지 무대 위에 드러낼 것인가를 놓고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이향조는 “내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낸다는 게 부담스러워 여러 번 주저하고 울기도 했다”며 “군무로서 안타까웠던 기억도 많지만 이 작품을 만들며 내가 발레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무용수로서 무대에 설 일이 많진 않겠지만 교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발레와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