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패러다임 전환] 줄이고 늘리고 ‘탈원전 실험’… 지구가 살아난다

입력 2017-06-12 20:47
지난 5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원전하나줄이기 5주년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박원순 서울시장(무대 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과 참석자들이 ‘탈핵 탈석탄 100% 재생에너지’라는 원전하나줄이기 정신을 담은 문구를 들고 있다. 서울시 제공
서울시 강서구 서남물재생센터에 설치된 태양광 시설.
“원전하나줄이기는 매우 야심찬 정책으로 현재까지의 성과는 가히 놀랍다.”

지난달 열린 서울국제에너지콘퍼런스에 참석한 존 번 석좌교수(미국 델러웨어대)의 말이다. 수치를 보면 확실히 놀랍다.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 신재생에너지 생산 등을 통해 원자력발전소 1기가 1년간 생산하는 에너지양인 200만 TOE(석유환산톤·원유 1t의 발열량)를 줄여보자고 2012년 4월 시작된 서울시의 원전하나줄이기 사업은 지난해 말까지 원전 2기분에 육박하는 총 366만 TOE를 달성했다.

이 사업에는 에너지를 절약한 만큼 인센티브를 받는 에코마일리지 회원 187만명, 태양광 설치 2만명 등 총 337만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이 기간 서울시에 태양광 미니발전소 2만5312개소, 연료전지발전소 442개소, 에너지효율화건물 57만2000개, 에너지 아끼는 착한가게 5022개소 등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서울시는 지난 5년간 시민들과 함께 노력해 원전 2기를 돌리지 않아도 될 만큼의 에너지를 줄이거나 생산한 것이다. 전국에서 이 사업을 함께한다면 상당수 원전을 멈출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대도시의 첫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

원전하나줄이기는 단순한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아니다. 원전과 석탄화력 발전에 의존한 에너지 과소비 사회에서 친환경에너지 기반의 에너지 저소비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다. 특히 말로만 논의해 오던 ‘탈원전’ ‘탈석탄’을 위한 한국적 모델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2011년 3월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전 세계에 원전의 위험성을 충격적으로 알렸다. 세계 각국은 속속 탈원전에 착수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이자 원전 의존도가 큰 한국은 예외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탈원전 실험을 시작했다. 원전으로 인한 재앙을 목격한 뒤 “뭐라도 해보자”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놓고 서울시와 시민,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찾아낸 에너지 전환 모델이 바로 원전하나줄이기였다.

반면 당시 중앙정부는 제5차·제6차 전력수립계획에서 원전 14기 증설, 석탄화력발전소 18기 확충 등을 발표하며 기존 방향을 고수했다. 서울시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요 관리로 시각을 돌린 반면 정부는 여전히 공급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정부와 서울시는 서로 다른 길을 5년간 걸어왔다. 그 결과 서울시는 원전 2기분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줄이는 데 성공했고 신재생에너지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5년간 39만 TOE의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했다. 그러나 정부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증설했고 그 결과는 미세먼지 악화로 이어졌다. 또 2016년 경주 지진으로 한국도 원전사고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음에도 노후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고 원전 추가 건설을 강행해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밀양, 당진, 창원 등 전국 곳곳에서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도 심화됐다.

원전하나줄이기는 대도시 차원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에너지 전환 실험이다. 서울시는 과감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실제로 달성함으로써 대도시에서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이 점이야말로 원전하나줄이기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 전환을 요청하는 목소리와 시도들은 그동안 늘 비관론에 발목이 잡혔다. “한국에서는 이르다”거나 “대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 등의 얘기들이 그것이다.

원전하나줄이기는 그 같은 비관론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지난 5일 ‘원전하나줄이기 5주년 기념 시민토크콘서트’에 참석해 “온실가스 감축은 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서울시가 거둔 성과가 있어 기대를 갖게 한다”며 “원전하나줄이기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새 정부 탈핵 정책과 원전하나줄이기

황보연 서울시 기후환경본부장에 따르면 5대 광역시가 앞으로 5년간 서울시처럼 원전하나줄이기 사업을 한다면 660만 TOE를 줄일 수 있다. 이는 원전 3기 또는 석탄화력발전소 7기가 1년간 생산하는 양에 해당한다. 또 전국에서 5년간 이 사업을 추진한다면 원전 14기 또는 석탄화력발전소 31기를 대체할 수 있다.

황 본부장은 “새 정부는 30년 이상 노후된 석탄화력발전소 10기 폐쇄, 신규 원전 증설 중단, 신재생에너지 생산 확대 등을 에너지 공약으로 발표했다”면서 “원전하나줄이기 사업을 전국화하는 것만으로도 새 정부 에너지 공약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 정책으로의 전환을 더는 미룰 수 없다며 탈핵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 9일 열린 원자력위원회는 대한민국 첫 원자력발전소인 고리1호기를 18일부터 영구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2012년 설계수명을 다한 월성1호기의 계속운전 여부도 이달 말 법원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글=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