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뉴스에 갑자기 동생 이름이 자막으로 뜨더라고요. 죽었다고. 망연자실했습니다.”
8일 오후 서울 구로구의 운수업체 사무실에서 만난 이석주(57·사진)씨는 30년 전 사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1987년 8월 22일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가두시위 도중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아 숨진 이석규씨의 친형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7, 8월에는 조선소와 자동차공장 등 전국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이석규씨의 사망은 영남권 중심의 노동자 투쟁이 수도권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형이 기억하는 동생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별 보고 출근해 별 보고 퇴근한다는 조선업 일을 하면서 한번도 힘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동생이 시위 선두에 섰다가 최루탄을 맞았다는 소식에 이씨는 순간 멍했다고 한다.
TV 뉴스로 소식을 접한 이씨는 울산에서 거제도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병원 주변은 경찰과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이씨는 동생이 잠든 영안실에 들어가기 위해 검문을 5번이나 받았다.
“조선소에 용접사들이 많으니까 영안실 문을 철판으로 용접해서 막아버렸죠. 혹시라도 시신을 뺏길까봐.”
이틀 뒤 두 명의 변호사가 영안실을 찾아왔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상수씨였다. 부검에는 가족과 노 전 대통령 등이 입회했다. 동생의 사인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망한 지 6일이 지나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동생을 묻었던 남원 산기슭의 흙은 무척 차가웠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팍팍하다. 이씨는 6월 민주항쟁에 비해 7, 8월 노동자투쟁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노동자도 노동자답게 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또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임주언 기자, 사진=김지훈 기자
[6월항쟁 30주년] “동생 최루탄 맞고 사망… 파업투쟁 확산의 계기”
입력 2017-06-10 05:00 수정 2017-06-10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