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합병 외압’ 문형표·홍완선 2년6개월 실형

입력 2017-06-08 19:23 수정 2017-06-08 21:06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성사되도록 국민연금공단을 압박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문형표(61)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1월 16일 재판에 넘겨진 지 143일 만이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최고의 연금 전문가로 꼽혔던 문 전 장관은 박영수 특별검사팀 ‘구속 1호’에 이어 ‘유죄 2호’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특검팀은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진료 사건에 이어 삼성물산 합병 외압이라는 핵심 혐의를 연이어 입증하는 성과를 거두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조의연)는 8일 직권남용·국회 위증 혐의로 기소된 문 전 장관에게 “복지부 공무원들을 통해 국민연금공단에 영향력을 행사해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침해했다”며 이렇게 선고했다. 문 전 장관 지시로 삼성물산 합병 안건을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찬성 의결토록 한 혐의(특경가법상 배임)로 기소된 홍완선(61)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도 같은 형을 선고했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던 홍 전 본부장은 법정 구속됐다.

“장관의 국민연금 압박, 직권남용”

재판부는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보여준 문 전 장관의 행위가 ‘복지부 장관으로서의 직권을 남용한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문 전 장관이 2015년 6월 하순 조남권 당시 복지부 연금정책국장에게 “삼성물산 합병이 성사되면 좋겠다”고 말한 점, 한 달 뒤에는 “연금공단 외부 전문위원회가 아닌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찬성 의결하게 하라”는 취지로 복지부 입장을 승인한 점 등을 판단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문 전 장관의 직권남용 행위는 복지부 공무원을 통해 국민연금의 개별 의결권 행사에 개입해 그 결정 방향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이라며 “그로 인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내부 위원회에서 찬성 의결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문 전 장관은 연금 분야 전문가이면서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해 기금 운용 독립성을 침해했다”며 “주주 가치 훼손이란 손해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과 불법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다만 “당시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국부 유출 논란 여론도 있었다”며 “문 전 장관이 경솔하게 판단한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홍 전 본부장에 대해서는 “외압을 막지 못하고 삼성물산 합병 찬성을 위한 배임 행위에 나아갔다”며 “기금 운용 원칙을 저버리고 부당한 방법으로 기금에 불리한 합병 안건의 찬성을 이끌어내 불법성이 크다”고 꾸짖었다.

이어 “그 결과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합병의 캐스팅 보트(casting vote·의결 동수 시 결정권)를 상실하고, 보유 주식의 가치가 감소하는 손해를 입었다”고 덧붙였다. 다만 홍 전 본부장의 배임 행위로 국민연금이 입은 피해액을 구체적으로 산정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 업무상배임죄만 유죄로 인정했다.

‘청와대 지시’ 여부 판시 없어

삼성물산 합병은 이재용(48)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핵심으로 꼽히는 사안이다. 이번 선고 결과는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61)씨, 이 부회장 간의 뇌물 혐의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청와대 지시 여부에 대해서는 따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문 전 장관의 직권남용 배경에 삼성 측 청탁이나 박 전 대통령 등 청와대 지시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시하지 않은 것이다.

특검은 문 전 장관의 범행 동기로 ‘청와대 지시’를 꼽았었다. 특검은 재판 과정에서 “문 전 장관이 청와대로부터 삼성물산 합병을 성사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직권을 남용했다”고 주장했다. 2015년 당시 메르스 사태로 복지부 수장이었던 문 전 장관의 책임론이 부각됐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청와대 지시를 이행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최씨는 삼성물산 합병 등을 대가로 최씨 딸 정유라(21)씨 승마지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등 모두 592억원 상당의 뇌물을 주고받거나 그러하기로 약속했다는 혐의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피고인의 범행 동기가 판결문에 반드시 판시돼야 하는 건 아니다”며 “다른 재판부에서 관련 사건이 심리 중인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글=양민철 이가현 기자 listen@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